아무튼, 야구
2025년 12월 05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11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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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60896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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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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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 79번은 예술가이자 독립출판인 김영글의 『아무튼, 야구』이다. 저자 김영글은 피구 공을 두려워하는 어린이, 구기 종목을 달가워하지 않는 청소년을 거쳐 당구공 몇 번 쳐본 것이 전부인 성인이 되었다. 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느 날 야구공이 나타났다. 암 수술을 겪고 남한강을 따라 떠난 어느 겨울밤, TV 속 야구 예능의 한 장면에서 ‘공 하나의 우주’에 매혹된 것이다. 『아무튼, 야구』는 글과 예술 안에 살던 여성이 야구를 만나고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렌즈로 삶을 바라보고 알아가는 이야기다.
바보 같은 스포츠
어떻게 구단주까지 사랑하겠어
내향인도 야구장에 간다
축구팬이 뭘 알아
반항하는 야구팬
야구 입문자의 국어사전
낭만에 대하여
아니, 우리 원팀 아니었어요?
야구를 뜨는 시간
다시 만난 히데오
여자는 어디에 있나
야구장이 있는 삶
승리요정은 없지만
집에서 집으로
공이 무서웠다. 큰 공이든 작은 공이든, 나를 향해 오는 공은 다 공포의 대상이었다. 계기라고 할 만한 사건도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봄날의 하굣길. 긴 포물선을 그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날아온 축구공이 이마를 때렸다. 뻑 하는 둔탁한 소리 뒤로 공은 사라졌고, 나는 뒤로 벌렁 넘어갔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하늘과 아이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눈앞에 태양처럼 큼지막한 잔상으로 남은 공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7면)
독자들은 슬슬 의문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 『아무튼, 야구』 아니야? 그렇다. 본격적인 야구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공을 던지고 놀지만, 어떤 사람은 야구와 조우하기까지 이렇게 긴 세월을 허비하기도 한다. 숱한 피구 시합과 허름한 당구장들을 지나고, 암 수술도 한 번쯤 거쳐, 초겨울의 남한강에 이르러서야. (12면)
이제 규칙도 어느 정도 알겠고, 선수들의 이름도 귀에 익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썸 타는 나날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하루만 떨어져도 허전한 마음. 물론 매일 야구를 챙겨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에너지도 제법 소모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무언가 시작되어버렸는데. 이토록 바보 같고, 신화적이며, 서스펜스 넘치고, 읽을거리 가득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의 저녁들을 거의 몽땅 바치는 수밖에. (23면)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응원할 팀을 정하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대답은 꽤 일관된 양상을 띠었다.
“두산으로 오세요.”
“기아가 짱이죠.”
“고향이 경남이라매. 그라모 롯데 아이가, 롯데!”
“작년에 엘지가 우승했잖아요. 엘지 팬 어떻습니까?”
모두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최고라며 권유했다.
모태팬과 올드팬은 이렇듯 명랑한 확신 속에 산다. (25-26면)
야구장은 많은 것이 허용되는 공간이다. 염탐꾼은 앞사람을 은밀히 구경하고, 사랑꾼은 연인의 곁에 말없이 있어준다. 응원가를 따라 불러도 되고, 원한다면 춤을 춰도 되고, 혼자 머리를 쥐어뜯어도 된다. 음식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자신이 염원하는 승리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마음을 모은다. 그 마음 앞에서는 ‘인싸’와 ‘아싸’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야구가 천만 관중 시대를 맞이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41-42면)
나는 점점 화가 많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욕설과 비속어가 틈만 나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남자친구는 내가 야구 중계만 틀면 아저씨로 돌변한다고 했다. 물론 아저씨라고 다 욕쟁이는 아니다. 하지만 사직구장 그물망에 매달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저씨들과 어느새 닮아가는 내 모습을 부인할 수 없었다. (54-55면)
부인하지 않겠다. 중견수로서의 능력만큼이나 그의 보조개를 높이 샀음을. 그러나 내가 상심한 까닭이 단지 미남 선수를 잃어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스포츠 문외한이라, 선수들이 사고팔린다는 개념조차 잘 몰랐다. 야구를 보기 시작하고서야 그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예전 같으면 그저 스쳐 들었을 뉴스였다. 호날두가 몇천만 유로를 받고 어디로 갔다느니, 손흥민이 이적할 수도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79-80면)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타석에 서기 전, 그는 방망이를 들고 조심스레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자를 벗어 한 손에 고이 쥐더니, 구장의 삼면을 차례로 바라보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적 후 첫 경기, 첫 타석. 그가 몸담았던 홈구장의 팬들에게 전하는 인사였다. kt 팬들은 박수로 답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웠노라고, 어디에 있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83면)
세상을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으로 바라본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실을 ‘직물이 되어가는 중인 뭉치’라고 불렀다. 그의 말을 흉내 내보자면, 야구공이란 ‘포물선이 되어가는 중인 실밥’일지도 모른다. 공이 어떤 경이로운 궤적을 그릴지는 그것을 꿰맨 이도, 던지는 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손을 움직이며 그 과정에 동행한다. 감는 손. 뜨는 손. 멈추는 손. 푸는 손. 실의 길을 따라 포물선을 그려보는 손. (92-93면)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한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알아보고는 반색했다. 오랜만에 마주친 모양이었다. 여자는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물었다.
“아직도 야구해요?”
두 마디 중 어디에도 강조를 넣지 않은 담백한 문장이었다. 맞은편 여자가 물음표만 뺀 똑같은 말로 대답했다.
“아직도 야구해요.” (108-109면)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무력한 연루자의 신세로
그저 지켜본다, 다만 화를 내면서
늦게 불붙은 만학도답게 저녁마다 야구를 공부하고 알아가던 무렵, 저자는 어느덧 ‘한화 이글스’의 팬이 되었다. 그렇게 팬으로서 경기에 몰입할수록 자신이 점점 화가 많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욕설과 비속어가 틈만 나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사직구장 그물망에 매달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저씨들과 어느새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야구는 재밌으려고 보는 게 아니라 화내려고 보는 거라는 말이 있다. 곱씹어보면 연령과 성별을 초월해 야구팬의 정서를 관통하는 말이 아닐까. 김영글은 묻고 답한다. 왜 야구팬은 이토록 자주, 그리고 유난히 화를 내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화낼 기회가 많아서다. 그런데도 야구팬은 매일 경기를 본다. 못하면 못한다고 화를 내고, 잘하면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어제는 왜 못했냐고 화를 낸다. 경기는 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쏟아낸다. 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믿었던 선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팀이 아무리 잘해도, 사소한 에러 하나로 경기는 뒤집힌다. 그리고 팬은 온 마음을 쏟아도 경기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럼에도 경기를 꺼버리지 않는 팬의 마음은 뭘까. 한번 마음을 준 이상, 손바닥 뒤집듯 팀을 바꾸지도 않는 그 심경 무엇일까. 야구팬은 절망을 끝까지 지켜보며, 다시 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다만, 화를 내면서 말이다.
“내향인도 야구장에 간다”
야구장에 너무 가기 싫지만 너무나 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내향인 야구팬의 마음이 아닐까. 내향인인 김영글도 마침내 마음을 내어 화와 에너지가 들끓는 그곳으로 간다. 야구장에서 내향인다운 방식으로 야구를 관람하고 다른 관람객들을 조심스레 관찰하고 돌아온다. 한편 야구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짧게 편집된 야구 경기를 못 보는 사람이었다. “삼진을 당한 타자의 어깨가 어떤 표정인지, 감독의 사인을 타자가 어떻게 오해했는지, 선발투수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턴지, 카메라에 잠깐 잡힌 관중석 응원판에 어떤 우스갯소리가 적혀 있는지” 시시콜콜한 디테일을 직접 봐야 그 서스펜스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읽기와 사랑의 본질은 애초에 효율성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야구를 통해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야구를 폄하하는 축구팬이라면 친구라고 해도 발끈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 경기를 해도 화나고 안 해도 화나는, 사계절 힘든 야구팬의 마음을 십이월에도 경기를 볼 수 있는 축구팬이 어찌 알겠냐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구단주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야구팬이 된다는 것은 팬으로서의 기쁨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시작되는 일이었다. 구단주 한화가 비윤리적인 사업을 하는 걸 알면서도 이글스를 애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의 모순 앞에서 김영글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꼈다. “존재 자체로 근사한 팀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좋아한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실천임을 깨닫는다. 사랑은 완전한 정당함 속에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복잡한 마음을 감내하며 끝끝내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일임을, 모순과 부끄러움과 책임감의 무게를 함께 끌어안는 일임을. 그것이야말로 팬으로 살아가기로 택한 자의 숙명이었다.
“우러러볼 만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이 그런 식으로만 작동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참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와 세상 사이엔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의 끈들이 있다. 붙잡는 것도, 끊어내는 것도, 그것을 지지대 삼아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도 모두 나의 몫이다.” (33-34면)
“아직도 야구해요?” “아직도 야구해요.”
: 어딘가에는 야구를 하는 여자가 있다
김영글은 야구와 여자의 교집합이 놀라울 만큼 작을뿐더러 어딘가 왜곡되어 있는 것을 알고 적잖이 당황한다. 여성 관중이 ‘패션팬’이나 ‘얼빠’ 같은 멸칭으로 불리는 가운데서도 여자들은 바쁘다. 경기를 보느라 바쁘고, 응원하느라 바쁘고, 굿즈 앞에서 지갑을 여느라 바쁘다. 타인의 평가를 판별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겨를이 없다.
야구를 하는 여자들을 보러 울진에 간 어느 날, 저자는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모양인 두 명의 여자 선수들이 담백하게 묻고 답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도 야구해요?”
“아직도 야구해요.”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저자는 짧지 않은 시간에 깃든 피로와 애틋함을 짐작했고, 다음 여자 야구 대회 일정을 찾아보느라 인터넷을 뒤졌다.
제철 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야구를
김영글이 만나고 이해한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스포츠와 달리 야구는 전쟁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다. 야구의 이런 본질은 사계절의 흐름과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제철 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야구를 기다린다. 초여름엔 초당옥수수를, 가을이면 단감을, 겨울에는 귤과 천혜향을, 봄에는 짭짤이토마토를 기다리는 것은 그에게 마음이 힘들 때를 위한 제철 과일 대처법이었다. 야구가 삶에 들어온 후로 그는 사계절을 감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얻었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프로야구 리그를 중심으로 재편했다. 그는 그 짧은 순환 속에서 일상의 리듬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야구는 내게 진정한 ‘리셋’의 쾌감을 알려주었다. 언 땅이 풀리고 흙내음이 스멀거리면 야구장은 다시 문을 연다. 모든 것이 제로에서 출발한다. 0승 0패. 열 개 구단이 똑같은 출발선에 선다. 선수들은 겨우내 다듬은 몸을 천천히 풀며 시동을 걸고, 프론트는 상대 틴 전력을 조심스레 분석한다. 봄은 희망이 허락되는 계절이다. 다 잘될 거라는 순진무구한 믿음이 팬의 마음속에 움튼다.” (137면)
봄이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야구 시즌은 해마다 어김없이 시작할 것이다. 누구에게는 야구 시즌의 시작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깃대 하나를 꽂는 일이 된다. 실패를 견디며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무튼, 야구』는 그런 세계에 대한 귀여운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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