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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

키아츠 기독교 영성 선집 12
키아츠( KIATS)

2023년 11월 18일 출간

종이책 : 2021년 03월 0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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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6037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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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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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출신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성 요한이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의 아이콘 숭배를 금한 법령에 반박하여 쓴 하나님의 성상에 대한 세 편의 논문 묶음집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나 성경의 인물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상에 종종 등장했다. 무엇보다 대중들의 교육열이 낮은 지역에서 그림과 조각과 아이콘은 글이나 문자보다 더 교육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아이콘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시각적 효과가 읽고 이해하는 글보다 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십계명 제2계명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절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경계석과 부담이 되었다.
이 책에서 성 요한은 많은 초대교부들의 글을 인용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거룩한 이미지나 아이콘을 통해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예시로 설명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하나님 또는 성인들의 성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공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변증 ㆍ 6
두 번째 변증 ㆍ 72
세 번째 변증 ㆍ 110

에필로그 “당대 최고의 신학자는 왜 레오 황제에 의해 손목이 잘렸을까?”_김재현 ㆍ 176
참고문헌 ㆍ 19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악마들을 개의치 않고 전혀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실로, 악마들이 이런 것들을 더욱더 행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들에 대항하는 수행에 전념하도록 합시다. 그들에 대항하는 큰 무기는 의로운 삶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 금욕적 수도사들을 두려워합니다. 즉 수도사들의 단식,밤새움, 기도, 온유함과 다정함, 돈에 대한 멸시, 허영이 별로 없음, 겸손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자선, 성내지 않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헌신이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수도사들이 발밑으로 그들을 짓밟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대항하는 전투에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짓밟고, 그리고 적들의 모든 힘을 이길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 -눅 10:19
-58-59쪽

에필로그

“당대 최고의 신학자는 왜 레오 황제에 의해 손목이 잘렸을까?
- 다마스쿠스의 요한, 아이콘 논쟁의 한 중심에 섰던 그의 생애와 시대

비잔틴기독교와 아이콘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틴기독교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는 나무에 새겨진 거룩한 이미지의 그림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그러한 이미지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사도들과 성인들의 얼굴을 담고 있다. 아이콘(이콘, icon)이라 불리는 그런 이미지는 단면, 양날개까지 가진 3면, 혹은 훨씬 더 정교하고 다양한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기독교에 존재하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인식적 거리를 생각할 때, 비잔틴 기독교는 우리에게 더욱 생경할 수 있다.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향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비잔틴 찬송, 주로 서서 드리는 예배, 예배당을 들어오는 사람들이 아이콘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는 모습은 때론 어색하기도 하다.
유대-이스라엘 종교적 토대에서 출발한 기독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시대와 지형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전 세계로 전 방위적으로 퍼져왔다. 오랜 세월 각 지역의 역사를 반영하면서, 크게는 로마가톨릭, 개신교, 비잔틴기독교 세 종파로 나누어지지만, 각 전통 안에서 지역과 민족과 소속단체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다. 이는 예배 의식에서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용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로마기독교가 석조건물과 돌로 만든 조상을 발전시킨 반면, 비잔틴기독교는 건물에 직접 그린 벽화와 아이콘을 발전시켜 왔다. 이중 아이콘은 비잔틴기독교를 대표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해 왔다. 사실, 아이콘은 8-9세기 서방과 동방 기독교 세계의 핵심주제였고,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중 두 번의 공의회에서 중심 주제로 다루어질 정도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했다. 이 에필로그에서는 비잔틴기독교의 역사와 이 논쟁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담아 보았다.

다마스쿠스의 요한(675년 또는 676년-749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주제와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학자요 수도자가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그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요한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635년에 다마스쿠스가 비교적 상처를 입지 않고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 만수르(Mansour ibn Sarjun)는 지역의 세금관리자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존 만수르(Mansour ibn Sarjun) 역시 세습이 가능한 궁정의 세금관리자로 살면서, 아들 존에게 비교적 다양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요한의 집안이 아랍 출신의 시리아 기독교 가족이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요한은 시칠리아의 고아 출신인 코스마스(Cosmas)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같이 교육을 받았다. 요한은 그의 나이 만 50세 어간이던 725년에 아버지의 직을 이어 일하던 궁정에서 사직하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인근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르사바(Mar Saba) 수도원에 안착했고, 이후 735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법과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수도생활과 작품활동에 전념했고, 교회 예전에 쓰이는 찬송가 작곡가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쓴 찬송가는 지금도 부활절에 비잔틴기독교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마르사바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요한이 725년 예루살렘 인근 마르사바에 정착했지만, 그의 평온한 수도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후인 726년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the Isauria, 717-741)가 아이콘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레오 3세의 법령에 반대해 바로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라는 세 편의 논문을 쓰면서, 아이콘 논쟁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흥미롭게도 요한이 머물고 있는 마르 사바는 다마스쿠스에서 멀지 않았지만 레오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고,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던 칼리프의 통치영역에 속해 있었다. 대중들에게 점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요한을 제거하기 위해 황제는 가짜 편지를 꾸며 칼리프에게 보내기도 했다. 황제가 위조한 편지는 요한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할 계획을 꾸미고 있어서 칼리프가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개의 손”
요한은 어느 날 자신이 고문을 맡았던 다마스쿠스의 군주인 칼리프의 급한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칼리프는 할아버지 시대부터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다마스쿠스에서 고위 재정관리를 세습해 맡아오면서 기독교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요한이 어떻게 다마스쿠스 전복 음모를 꾸밀 수 있느냐는 서슬 퍼런 호통을 쳤다. 레오 3세 황제가 위조한 편지를 던져주면서, 칼리프는 반역 음모죄로 지체 없이 요한의 오른쪽 팔목을 잘라 시장에 걸어두고 이를 만인들에게 보여 경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요한이 죽지 않은 것만 해도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은덕이었다.
이렇게 손목이 잘린 요한의 이야기는 이후 하나의 흥미로운 성인전(Hagiography)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세 개의 손”이란 작품이 그 결과이다. 예기치 않은 사건 전개로 충격을 받은 요한은 잘린 손을 몸에 붙여 들고 이웃에 있는 성모상 앞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놀랍게도 손목이 다시 원래 상태로 회복되어, 잘린 손목 부분에 붉은 선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기적적인 회복사건을 경
험한 요한은 은으로 손을 만들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성모의 성화에 붙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세 개의 손을 가진” 성화, 즉 “Tricheirousa”가 만들어졌다.

아이콘
요한의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라는 책은 당대 아이콘 논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나 성경의 인물을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상에 종종 등장했다. 서방과 동방에서 아이콘을 비롯한 이런 상징물은 당대 문화적 상황 때문에 옹호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중들의 교육열이 낮은 지역에서 그림과 조각과 아이콘은 글이나 문자보다 더 교육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아이콘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시각적 효과가 읽고 이해하는 글보다 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십계명 제2계명이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절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경계석과 부담이 되었다. 특히 이 시대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서쪽과 북쪽으로 진격해 오던 이슬람 세력이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던 상황도 성상과 관련해 기독교인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726년에 황제 레오가 내린 아이콘 숭배 금지는 에게해의 화산폭발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아이콘을 비롯한 성상 파괴 명령은 730년에 공포되었다. 이때부터 아이콘, 모자이크, 각종 형상을 금지하는 칙령이 강력하게 적용되었고, 이를 따르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의 활동도 급증했다.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
레오 3세의 직접적인 관할영역을 벗어나 있던 요한이 자신의 입장을 담아 대중들에게 전한 세 편의 논문이 바로 우리가 번역 출간하는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하나님 성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항한 3개의 변증》이라는 책이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중심적인 것만 지적하려 한다.
첫째, 요한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아이콘은 경배(λατρε?α, adoration)되어서는 안 되지만, 공경(προσκνησι?, honor)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공경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성상을 공경한다. 그것은 물질에 공경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상에서 사용되는 물질을 통하여 보여지는 분들에게 공경을 드리는 것이다. 성 바실리우스가 말하듯이, 성상에 드려지는 공경은 모두 그 원형으로 이전된다.[41번]”
둘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거룩한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성육신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드러내 주었기 때문에, 이후에 인간이 예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이나 다양한 인간적인 수단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더이상 신성모독이 아니다.
셋째, 자기 자신의 주장을 서술한 후에, 바실리우스 등을 포함한 많은 초대교부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증을 강화했다. 초대와 중세기독교 신학자들이 즐겨 의존한 교부들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와 함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강력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넷째, 요한의 논증은 결코 쉽지않은 이 주제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주면서 단순하게 설명해 준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었다. 요한이 죽은 이후 성상 문제로 10만 명 정도가 죽임을 당하거나 사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1890년에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로마교황청에 의해 신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아이콘 논쟁, 레오 3세에서 여성황제 이레네까지
콘스탄티노플 황실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대 상황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과 성인들의 거룩한 이미지를 공경하는 것을 이단이라 주장하면서 이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이 황실 내부로 포진했다. 레오 3세는 전임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교부들과 성인들을 그린 어떠한 상이라도 파괴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성 게르마누스(St. Germanus)는 적극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인근에 있던 요한에게 주목했다. 요한이 나서서 황제의 칙령에 반대하는 신학적인 글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요한은 〈거룩한 이미지들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법적 논문들〉이라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일까? 이는 그를 당장 유명인사로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요한을 “다마스쿠스를 흐르는 황금의 강” 즉 황금 시인과 문인으로 칭송했다.

비잔틴제국과 기독교의 갈림길에 선 황제, 레오 3세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와 문화적 황금기는 유스티아누스 1세(Justianus I, 481-565) 시절이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스티아누스 법전》(Codex Justianus)의 주역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세계적인 종교건축물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건립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의 힘없는 몰락과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목격한 비잔틴제국은 군인양성에 보다 많은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양성한 군인들은 이후 정치적인 쿠데타와 전복을 일삼았고, 비대해진 군인 지도력은 일반 국민들을 진절머리나게 했다. 어찌 보면 이러한 혼란의 종지부를 일시적으로 찍어준 사람이 바로 레오 3세였다.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는 유스티아누스 1세 이후 거듭된 군부 출신 황제들로 인한 혼란과 거침없이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던 시대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전임 황제 테오도시오스 3세(Theodosius Ⅲ, 재위 715-717)를 강제로 퇴위시키기 위해 레오 3세는 협상과 위협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717년 마침내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이때만 해도 그가 단명 황제가 되느냐, 아니면 지지부진한 비잔틴의 자존심을 회복해 주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다.
레오 3세가 논란 끝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그해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비잔틴제국이 큰 위험을 직면하던 때이다. 이슬람의 8만 대군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바다와 육로를 통해 포위했다. 이곳을 이슬람에게 넘겨주면 바로 유럽의 옆구리에 좋은 침략의 비단 길목을 깔아주는 형국이었다. 임진왜란 시절 우리가 일본에 굴복했다면, 일본은 그 비단길을 고즈넉이 밟고 중국으로 향했을 상황과 같았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동안 서방기독교와 이슬람제국 사이의 완충역할 역시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3세는 1년 어간을 견디며, 결국 이슬람의 진출을 저지했다. 결과적으로 레오 3세의 용단과 저항 기질이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확장을 막았고, 그는 이후 100여 년에 걸친 이사우리아 제국시기(717-802)를 열었다. 지금까지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을 제거한 그는 심지어 병으로 죽기 직전인 740년 아크로이온 전투에서 승리해 비잔틴과 이슬람 사이의 전투에 잠시 종지부를 찍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안정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성상파괴론, 왜 레오 3세는 기독교권에서 그리 욕을 먹었을까?
군부를 통제하면서 정치적 승리를 얻어낸 레오는 종교적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서방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벽화와 아이콘 문화가 발전한 비잔틴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성인과 교부들에 대한 존경은 예술적 표현을 통해 종종 숭배의 경지까지 가곤 했다. 모든 종교의 발전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좋은 의미로 시작된 것에 주술적이고 샤머니즘적 옷이 입혀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거룩한 이미지’들은 성인숭배와 경배의 수준까지 가버린 경우가 사실 많았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가던 레오 3세는 이런 상황에서 ‘성상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서방기독교가 성상숭배에 엄격히 반대하고, 비잔틴기독교는 이를 처음부터 옹호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이 시기 로마기독교라고 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신학적 담론이나 사상이 정교하게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도 긴 시간이 서방기독교뿐만 아니라 비잔틴기독교에서 필요했다.
레오의 성상금지 칙령에 당시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Ⅱ, 재위 715-731)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라벤나 지역을 통해 반 비잔틴 황제, 실정법에 따르면 역적과 반역에 해당되는 봉기를 부추기기도 했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 아직도 다섯 곳의 총대주교들이 기독교 세계를 분점해 리더십을 발휘하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베니스(베네치아)를 비롯한 로마의 기독교 상황이 보여주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방과 서방의 경계선이 아직은 모호했다.
서방기독교의 격렬한 반응과 레오 황제의 결정은 비잔틴과 로마의 치열한 논쟁과 공격뿐만 아니라 비잔틴제국 내에서도 찬반논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웅이 되고 손목이 잘린 사람이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레오 3세에 대한 평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역할은 이슬람 세력을 잠시 주춤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24년간의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성상문제는 다른 모든 것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방에 비해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비잔틴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 레오 3세는 황제 즉위 24년인 741년에 병에 걸려 죽었고, 그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V, 재위 731-775)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더 극렬하게 성상 파괴를 실행했다. 이후에 짧게는 787년 제2차 니케아공의회까지 성상파괴문제는 가장 중심적인 정치-종교적 화두로 자리했다. 바로 그 출발점에 레오 3세가 있었다.
레오 3세의 영향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제국인 로마가 동과 서로 나누어지면서 점차 멀어졌는데, 성상 문제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중단기적으로 300년쯤 후에는 서방기독교와 비잔틴기독교가 분리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리고 1453년 로마기독교로의 환원이라는 서방의 조건부 지원에 반발하여, 동로마 제국의 문은 닫혔다.

다섯 곳의 총대주교 시스템
지금처럼 기독교가 로마가톨릭, 개신교, 비잔틴기독교 등으로 구별되기 전에 기독교권 전반에서 Catholic(universal, 보편적인) Faith(소문자 catholic이 아님)를 고백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로마 총대주교, 즉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계적으로 하나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다섯 곳의 교회 수장들이 총대주교라는 이름으로 주요신학과 신앙의 모본들을 체계화해 나갔다. 초기 기독교와 중세 초기 기독교의 주요한 의제들은 이런 공의회들을 통해 하나둘씩 정립되었다. 비록 때론 정치와 종교가 버무려져서 말이다.

5곳의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은 곳들에 위치해있었다.
- 베드로의 전통성과 수장권을 강조한 로마 총대주교(교황)
- 서로마 몰락 이후 실질적인 권력 기반을 가진 콘스탄티노플
- 초대교회와 초대수도원운동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 신,구약/이슬람 세력의 중심지 예루살렘
- 갑바도기아 신학의 핵심지역 안티오키아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이슬람 세력이 급격히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소아시아를 공격하고 점령하기 전까지 다섯 개의 총대주교 시스템이 나름 정상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이후에도 각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들이 참여하거나 의견을 표명해 회의를 열고 주요의제를 정리해 나갔다.
광대한 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인 회의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다. 예수의 신성보다 인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하면서 소집된 제1차 회의부터 총 일곱 번의 공의회가 서방과 동방의 교회를 비롯한 보편적인 기독교의 회의로 자리해 왔다.

제1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년)
제2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
제3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에페소스공의회(431년)
제4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칼케돈공의회(451년)
제5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553년)
제6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680-681년)
제7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

이 회의들을 통해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오늘날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학적인 논쟁으로 가다듬어 온 결과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곧 다시 오신다는 예수의 재림은 소식이 금방 없었고, 신앙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제기한 각종 문제는 대답을 기다렸고, 교회는 이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했다. 시대에 대한 대답은 325년부터 787년까지 열린 일곱 번의 에큐메니칼공의회를 통해 주어졌고, 이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이슈들을 보편적 회의를 통해 집대성하고 정리해 나갔다.
모든 교회가 수용하고 인정한 일곱 번의 공의회가 모두 비잔틴 제국의 영토에서 열렸다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로마의 몰락 이후 비잔티움의 전개에 우리 개신교인들이 다소 무지하다는 지적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각종 회의와 공의회라 이름을 붙일만한 회의가 많이 열렸지만, 더이상 동방과 서방교회들이 연합해 추인할 상황이 아니었다. 언어의 차이, 지역의 광대함, 신앙행태와 문화의 선호도 차이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신앙’(One Faith)를 고백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었다.

레오 3세와 콘스탄티누스 5세의 반격도 막을 내리고…
서로마제국의 몰락의 여파는 컸다. 하지만, ‘로마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언덕’을 넘어서는 로마교회의 수장권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제 막 태동하던 서유럽 형성기에 기독교는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가고 있었다. 비록 비잔틴제국의 권력은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군벌과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슬람의 군사적 위협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막아내면서 비잔티움을 지켜낸 황제 레오 3세는 성상금지라는 종교적 악수를 두었다. 그가 시작한 종교적 혼란은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많은 숫자의 종교적 순교자를 만들어 내었다.
775년 콘스탄티누스 5세가 죽고 나서야, 그의 후계자 레오 4세(재위 775-779)가 즉위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그의 아내 이레네(Irene)는 성상을 옹호했던 여인이었고, 레오 4세가 즉위 5년만에 병사하고, 10살밖에 되지 않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6세로 즉위하자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쉽게 말해 이제 전설적인 여자 황제 이레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레네 황후의 정치력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배경 삼아 섭정과 함께 권력을 쥐기 시작한 황후 이레네는 기존교회가 지켜온 에큐메니칼공의회의 장점을 활용하려 했다. 그녀는 먼저 로마교황 측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를 썼고, 서유럽 권력의 정점으로 달리고 있던 카를 대제와 혼인척을 맺기 위해 고민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레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와 카를 대제의 딸과의 결혼은 그런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성상파괴를 옹호했다가 사임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자리에 자신의 비서 출신 타라시우스(Tharasius)를 급조해 총대주교의 자리에 앉혔다. 이레네의 종교적 정치적 술수를 잘 보여준 은밀하지만 치열한 싸움이었다.

제7차 에큐메니칼공의회(787년 9월과 10월)
786년에 시도한 제7차 공의회는 성상자체를 반대하는 군인들의 회의장 난입사건으로 1년 연기되어, 787년 가을에 마침내 개최되었다. 새롭게 건축된 성 소피아(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개최된 공의회였다.
9월 24일 로마교황의 사절단을 비롯한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타르시우스가 공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3주에 걸쳐 여덟 차례 회의를 진행한 이 공의회는 마지막 8차를 제외하고 모두 성소피아 성당에서 열렸다.
이때 같이 규정된 22개의 교회생활 규율은 당대 교회 권력의 문제를 살짝 엿보게 해준다. 바로 한 구절 한 구절이 당대 기독교뿐만 아니라, 중세기독교 전체의 화두가 되었다.
- 세속권력은 주교, 사제, 부제를 임명하지 못한다.
- 주교는 아래 있는 성직자들에게 돈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 성당마다 유해를 모셔야 하며, 유해가 없이는 축성하지 못한다.
- 성직자들은 허가 없이 자신의 교구를 떠날 수 없고,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해서 안 된다.
- 주교나 수도원장은 교회 재산을 세속권력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

이레네의 삶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7차 에큐메니칼공의회
이로써 726년 레오 3세의 회의 소집과 함께 불기 시작한 성상관련 억압과 박해의 광풍은 일단락 되었다. 7차 공의회 참석자들이 기존 회의록을 읽고 이를 거부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이다. 레오 3세가 그렇게 강조한 성상숭배금지 법령은 폐지되어, 이제는 성상을 만들고 공경하는 것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인 성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에 대한 흠숭을 구별했다. 이 회의는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여전히 종교적,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논의의 신학적 기초는 다름 아닌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의 성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 모든 무대의 기획자는 비잔틴제국 최초의 여성 황제 이레네였다. 하지만 아들의 눈알까지 빼버린 이레네의 본 모습을 볼 시간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아직은 이레나가 카를 대제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야심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다마스쿠스의 논쟁은 이 공의회로 일단락되었다. 명예회복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레네에게는 이 공의회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이런 맥락을 염두하고 본 작품을 읽는다면, 한층 더 진지하게 그 내용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짧지만 깊은 감사의 말 추가
다양한 비잔틴기독교의 자료를 접하게 해 준 하버드대학과 연관된 덤바턴 오크스 도서관(Dumbarton Oaks Library)에 감사를 표한다. 본 한글 번역과 편집작업은 오랜 세월 다양한 언어로 진행되어 온 각종 자료들을 사용했으며, 성 블라디미르신학교 출판사(St. Vladinir’s Seminary Press)의 여러 번에 걸친 업데이트된 자료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작가정보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주제와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학자요 수도자가 바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이었다. 그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요한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635년에 다마스쿠스가 비교적 상처를 입지 않고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 만수르(Mansour ibn Sarjun)는 지역의 세금관리자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존 만수르(Mansour ibn Sarjun) 역시 세습이 가능한 궁정의 세금관리자로 살면서, 아들 존에게 비교적 다양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요한의 집안이 아랍 출신의 시리아 기독교 가족이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요한은 시칠리아의 고아 출신인 코스마스(Cosmas)와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같이 교육을 받았다. 요한은 그의 나이 만 50세 어간이던 725년에 아버지의 직을 이어 일하던 궁정에서 사직하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인근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마르사바(Mar Saba) 수도원에 안착했고, 이후 735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법과 신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수도생활과 작품활동에 전념했고, 교회 예전에 쓰이는 찬송가 작곡가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쓴 찬송가는 지금도 부활절에 비잔틴기독교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영성신학(석사)을 공부했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대학 내 세인트마이클대학에서 초기교회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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