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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 김범 옮김
글항아리

2023년 07월 07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05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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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26.64MB)
ISBN 97911690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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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전체 3

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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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다뤘지만, 사실 전쟁을 넘어 한 시대와 역사에 대한 증언이 된 현대의 명저!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전쟁에 관하여 이 연구를 넘어선 책은 단연코 없다!

“상당히 자랑스럽게도 『한국전쟁의 기원』 두 책은 세 가지 상을 받았다.
1권은 미국 역사학회에서 19세기 이후 시대를 다룬 가장 우수한 저서에 수여하는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저작상을 받았다.
2권은 국제연구협회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의 퀸시 라이트Quincy Wright
저작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4년 전두환 독재정권은 1권을 금지도서 목록에 올렸는데,
두 권뿐인 외국인 저서 가운데 하나였다.” _ 브루스 커밍스,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1부 배경

1장 식민지 한국의 계급과 지배 기구
식민지 통치 기구 | 철도망의 발달 | 상업 | 노동력의 동원 | 저항운동
2장 식민지 한국의 지주와 소작농
일제강점기의 농업 | 한국 농민과 시장의 출현 | 한국의 인구 유출 | 동원과 반란 | 결론
3장 혁명과 반발: 1945년 8~9월
일본 식민 통치의 종식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 |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대 | 결론
4장 도가니 속의 한국 정책 - 1943~1945년 미국의 한국 정책에서 나타난 대립
신탁통치안의 대두 - 1943년 3월 | 카이로회담: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 | 얄타와 포츠담: 불확실한 신탁통치 | 전후 최초의 봉쇄작전: 1945년 8월 한국의 분단 | 오키나와에서 서울로 “긴급히 이동하다” | 출발 전의 정책과 계획 | 결론

2부 1945~1947년 중앙의 정치 상황

5장 새 질서의 구축: 미군의 진주와 정부·경찰·국방 정책
인천과 서울: 새로운 우방과 적 | 식민지 관료 기구의 재건 | 사법과 경찰 기구 | 국방경비대의 출범
6장 남한 단독정부를 향해
임시정부의 귀국과 “정무위원회” | 좌익에 대한 탄압 | 토지·미곡 정책 | 결론
7장 국제협력주의적 정책과 일국독점주의적 논리: 경직되는 중앙의 태도, 1946년
후견과 독립, 민족 반역자와 애국자: 신탁통치를 둘러싼 혼란 | 궁지에 몰린 하지 |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한 과도정부로 | 미소공위의 협상 | 미소공위를 전후한 좌익 탄압 | 좌우합작위원회와 과도입법의원 | 결론: “불만의 소리”

3부 1945~1947년 지방에서 발생한 한국인과 미군의 충돌

8장 지방 인민위원회의 개관
인구 변화 | 교통과 통신의 상황 | 토지 소유 관계 | 지리적 위치 | 공백기의 길이 | 정치적 전사와 지표 | 미군의 각 도 점령
9장 지방 인민위원회의 운명
전라남도 인민위원회 |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 충청남·북도 인민위원회 | 강원도와 경기도 인민위원회 | 제주도 인민위원회 | 결론
10장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
9월 총파업 | 10월 봉기 | 진압의 방법 | 파업과 봉기의 원인 | 결론
11장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련의 점령 | 하의상달下意上達의 정치 | 상명하달上命下達의 정치 | 김일성의 집권 | 북한의 중앙집권화 | 사회혁명 | 통일전선 정책 | 남쪽으로 부는 북풍 | 결론
12장 결론: 부정된 해방

부록 / 주 / 참고문헌 / 옮긴이의 글 / 찾아보기

전설의 문제작 43년 만에 완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드디어 한국어로 완역 출간되었다. 미국에서 1권이 출간된 1981년으로부터는 43년 만이고, 2권이 나온 1990년으로부터는 34년 만에야 이뤄진 일이다. 한국전쟁이 70주년을 맞고서도 몇 년이나 더 지나서야, 무성한 소문과 이런저런 설의 진원지로 오해되고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온 커밍스의 주저가 한국 땅에 안착해 독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독자들은 의아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최초로 방대하게 다루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책이 이제야 완역됐다는 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벌어진다. 해외 한국학 성과들을 국내에 꾸준히 번역 소개해온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단독으로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해 순수 번역에만 5년이라는 시간을 바쳐서 완성해냈다. 그 후 그는 출판사에 접촉해 브루스 커밍스와 정식으로 한국어판 계약을 맺은 후 출간이 이뤄질 수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번역 원고를 읽어본 후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에서 “고단한 작업을 끝낸 김범 박사가 이제 충분히 쉬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독자에게 그의 번역을 강력히 추천한다”라고 격려했다. 또한 그는 “40년 전 1권이 출판된 책이 이제야 공식적으로 번역된 것”에 대해 “전두환 정권의 금지도서 목록에 올라간 것”과 “한국에서 분단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들어 이해될 만한 일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우리의 역량과 열의의 부족을 탓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그 내재적 동학과 전쟁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탐구보다는 “범인을 찾는 식”으로 전쟁 발발의 책임 소재를 밝히기에 집착해왔던 점, 미국·소련의 기밀문서와 북한 측 노획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대략적으로 큰 그림이 나오자 커밍스 책의 오류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커져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커밍스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소련 문서들을 통해 전쟁 전 김일성의 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가 있었다는 점을 인지한 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은 정권 초기단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이 필요했다는 게 학계의 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출간의 의의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신복룡 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매우 난해하고도 미묘한 성격을 안고 있다. 선전 포고가 없는 전쟁, 승패가 없는 전쟁,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최초의 전쟁, 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켜 민족사적 비극을 극대화시킨 전쟁, 이데올로기적 결전(냉전)을 가속화시킨 전쟁, 무엇보다도 개전의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이고, 전쟁의 상대방인 북한은 이제 핵무장을 완성했고, 변함없이 한반도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고, 38선 인근의 작은 도발도 톱뉴스가 되는 사회에서 이 전쟁은 결코 역사가 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현실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현안이다.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분단체제라는 말이 유효한 땅에서 한국전쟁은 겉으로 드러난 전투 양상과 개전의 책임론에 가려진 긴 시간 동안의 사회동학 문제가 다시 전면에 올라올 필요가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바로 이 측면에서의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커밍스의 책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비판도 많이 이뤄져왔다. 그중 소련의 지령을 받은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전통주의 학설에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수정주의’라는 점은 이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수정주의 등의 담론의 틀에서 커밍스의 잭을 재조명하는 일은 입체적인 이 책을 지극히 평면적으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극도로 피해야 할 일이다. 사실이 잘못돼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의 ‘수정’이란 말에 ‘주의’를 붙인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어법인 데다, 워낙 오류로 밝혀져 폐기된 입장도 많아 논의 지형 자체가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게 옳다.
『한국전쟁』을 쓴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커밍스의 주장을 비판했지만 정작 커밍스의 책을 통독해보면 커밍스가 이 전쟁에 대해 미국책임론에 크게 기울어져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지나치게 내부적 요소를 강조해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이번 완역판을 찬찬히 읽어보면 커밍스가 ‘내전’을 강조한 이유는 미·소 양국의 대립으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이었지, 그가 한국전쟁이 “내전적 성격을 띤 국제전”이라는 점을 부정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미국의 세계 전략에 따라 전쟁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복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커밍스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박명림 교수는 “남침설을 가장 강력하게 회의하며 이에 대한 반명제를 구명하려 시도해온 브루스 커밍스”라고 지적했지만, 커밍스는 북침설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애초에 지적했으며, 1950년 이전부터 중소규모의 유격전과 국지전이 1년 넘게 반복되며 10만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전면전으로의 전환이 과연 남침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냐는 회의감이자 더 정확한 실상에 대한 요구였을 뿐이다. 1952년에 『한국전쟁의 비사』를 펴내 전쟁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이승만, 맥아더, 덜레스, 장제스 등이 침묵의 음모로 그것을 방조했다는 I. F. 스톤의 ‘남침유도설’에 더해 커밍스의 책에서도 그 부분이 재검토되고 있다. 이에 대해 커밍스를 ‘음모론자’로 보는 입장도 생겼지만 전쟁 당시 미 국무부의 딘 애치슨이 나중에 사석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 추구에 필요한 국방비 증액과, 분열된 국론의 통일에 있어 한국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지의 일이다. 한국 내부의 동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농민’ 섹션을 너무 중시했고, ‘노동’과 ‘노동자’ 섹션이 갖는 중요성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손호철 교수 등의 지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제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육중한 몸체를 그대로 내보이게 됐다. 특히 번역되지 않아 소문만 무성했던 제2권은 분량도 1권의 두 배에 달하는 데다 1945~1947년을 다룬 1권에 비해 1947년부터 전쟁 발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1권과는 달리 한반도의 상황보다 먼저 미국의 외교정책, 세계정책, 한반도정책, 소련정책, 일본정책 등을 매우 밀도 깊게 구체적으로 짚어 이 전쟁의 국제전적 측면을 정말 공을 들여서 그려내고 있다. 이제 커밍스의 책은 한국 사회에서 다시 읽히고rereading, 그럼으로써 이 책이 식민지시대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이 사회가 겪은 여러 가지 격동적 변화와 그로 인해 배태된 사회적 갈등과 그 분출을 촘촘하게 그려낸 시대의 세밀화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분단체제의 출발점이었던 미 군정의 진주와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고, 정치경제적으로 패권을 추구하기 위한 외곽 한계선을 설정하기 위해 이 땅에서 벌인 구체적인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식민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막 독립한 나라와 민족들을 통제하고 이것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그들이 짰던 전략과 실수들, 그에 기반해서 이뤄졌던 사회 통제와 회유, 탄압 등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혁명이 아니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계급 갈등이 심각해 식민 권력이 물러난 무주공산에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는 점, 그렇기에 북한의 남한 적화 야욕이 그 당시 문맥에서는 그다지 끔찍한 상상력이 아니었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진영과 이념과 매너리즘에서 벗어난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여전히 민족적 현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 되고,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는 대중적 분위기에서는 철도 부설과 산업화 시설 같은 식민지 근대화의 측면을 여타 서방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의 나라들과 다른 한국의 특수성으로 인정한 커밍스의 입장은 불편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가 이 책에서 미군정이 친일 세력을 그대로 용인하고 행정 권력으로 연착륙시킨 지점을 반복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것이 내전적 요소의 핵심으로 강조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1권, 해방과 분단 체제의 출현 1945~1947

커밍스는 1권의 머리말에서 말한다.

“이 연구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차적으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일어난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2차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돼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에 특별한 흔적을 남겨놓은 세력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막간-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해 분단국가 수립을 거쳐 1950년 대포의 포성으로 끝난-의 특징은 혁명적 성격이 짙은 시기였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한반도 전역에서는 정치·경제·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정치 변화의 요구는 정당,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청년·여성의 대중조직 같은 여러 단체를 스스로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의 농민이 지주에게 지배된 소작제 아래 놓여 있던 토지 상황에 초점을 맞춘 사회·경제적 변화의 요구는 이런 폭발적 정치 참여를 불러왔다. 다시 말해 1945년이라는 격변기에 전개된 한국 정치를 연구하려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근본 문제인 지주와 농민의 관계를 다뤄야 한다. 이것은 일본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한국 사회가 지닌 본질적 특징이었다.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의 기본 쟁점은 해방 3개월 만에 명백해졌고, 1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농민 반란·노동운동·유격전과 38도선 일대의 전투를 유발했다-이것은 모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했다. 달리 말하면 1945년부터 시작돼 혁명과 반동의 변증법을 거치며 전개된 충돌은 국내적이고 혁명적이었다. 1950년 6월에 시작된 재래적 방식의 전쟁은 그저 다른 수단으로 이 전쟁을 지속한 것이었다.
그 전쟁은 본질적으로 내전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국은 진공 상태가 아니었으며 서로 주도권을 다투는 강대국과 한국의 힘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운 외부 힘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 상처 입지 않은 채 해방을 맞지는 않았다. 양쪽 다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그 식민지 외피는 오랜 기간 지속되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아울러 1945년 한국은 사회 내에 잠재하는 모순이 뚜렷이 나타나자 그것을 홀로 해결하지 않고 전후戰後 시기를 지배한 새로운 두 강대국, 소련·미국과 두 고대 국가, 국내 혁명에 휩쓸려 있던 중국과 몰락한 제국 일본과 함께 풀려고 했다. 이처럼 40년 가까이 일제에 속박되었던 한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분단되는 비운을 맞았다. 일본부터 만주까지 길고 복잡하게이어진 구조는 즉시 해체됐고, 그 뒤 5년 동안 한반도에 제기된 질문은 어느 쪽-모스크바·워싱턴·베이징-에 새롭게 충성할 것인가였다. 또는 한국은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통일국가의 이상을 실현할 것인가? 한국전쟁은 이런 문제와도 연결돼 있었다.(27~28쪽)

제1권에서는 해방 이후 첫해를 주로 다뤘다. 그 시기에 남한과 북한 모두 기본 구조가 형성되고 전쟁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1950년과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연구가 집중되면서 그해는, 그리고 때로는 1948년에 이르는 기간까지도 대체로 무시돼왔다-마치 1948년이나 1949년 이전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남한에서 3년 동안 시행된 미군정만 간단히 언급하면 된다는 태도다. 그러나 1948년 남한과 북한에서 분단 정권이 수립된 것은 1945년과 1946년에 만들어진 사태의 최종적 표현일 뿐이며, 한국전쟁은 그 이전 5년 넘게 계속된 갈등의 대단원이었다. 요컨대 1945년 8월 및 1950년 6월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은 끊기지 않는 사슬로 얽혀 있다.
1945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자체적인 배경도 있었다. 한국의 옛 질서를 무너뜨린 36년의 식민 지배와 거기서 동원된 여러 방법은 일제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고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일본의 통치는 변화를 촉진하거나 억제하면서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한국 노동계급의 출현을 촉진하고 기업가적 요소의 발전을 저해했다. 일제는 중심부인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근대화시켰고, 1931년 이후 한국과 만주를 통합하려고 시도하면서 도로·철도·항만·통신 시설을 건설했다. 그들은 북부 지방에 주요 산업 시설을 세웠다. 이런 근대적 시설은 모두 당시 한국으로서는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어서 한국 사회 구조의 실제적 강점(또는 약점)과는 거의 부합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농민은 소작 제도에 저항했고, 양반은 뒤로 물러나 인내를 요구하는 교육 활동을 하거나 개인적 명상에 빠졌으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 유격대는 제국의 주변부나 빈틈을 공격해 일본이 시도한 변화에 저항했다. 그에 맞서 일제는 긴밀하고도 속속들이 침투시킨 국가기구를 이용해 식민지를 개발하고 저항을 진압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국가의 전통적 역할을 극도로 왜곡하고 전간기에 전개된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비대하고 둔중한 관료제도의 유산을 전후 한국에 남겨놓았다. 농업과 산업의 변화는 농민에게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한국 계급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해방 정국에서 대규모 참여와 폭넓은 저항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것은 토지 소유의 변화와 국제무역 증가, 광범한 사회적 이동,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집중된 전쟁 수행 노력에 한국인이 적극적ㆍ직접적으로 동원되면서 나타난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수많은 농민은 뿌리 뽑혀 해외로 이주하거나 공업에 종사하게 됐다. 이런 사건들은 갑자기 광범하게 그리고 처음 일어날 때 가장 큰 피해를 준다. 한국에서 대대로 정주한 사람들은 오랜 일상을 잃어버렸고 식민 체제가 종말을 맞자 사회로 풀려나왔기 때문에 그 영향은 일본인이 자기 섬으로 되돌아간 후에 훨씬 더 커졌다. 해방 기간에 폭발적으로 나타난 대중 참여의 원천적 동력을 제공한 것은 이런 농민-또는 노동자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농민과 귀향한 군인 등-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들은 일본이 힘을 잃었지만 연합군이 완전히 점령하기 전인 해방 직후에 가장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시간은 한국인이 주도한 격렬한 변화의 무대였다. 그 시간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인민위원회·노동조합·청년 단체와 지방의 농민조합 같은 새롭게 결성된 좌익 정치단체들이 지배했다. 이 기간에 모든 한국인에게 새로운 ‘인민공화국’이라는 개념과 수많은 자치 조직의 실체가 나타났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런 해방 체제와 그것의 운명은 1950년까지 한국 정치의 중심 쟁점이 됐다. 외국 세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 기간의 충돌은 이후 특히 한국적이고 내전적인 전쟁의 기원을 따질 때 핵심적 요소였다. 당시 상황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이 당시 한국에 이미 존재하는 균열들을 둘러싸고 서로 침해하면서 대립했다는 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운명에 중요한 책임을 지게 된 상황은 분명치 않으며, 소련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자료가 없어 이 책에서는 소련의 동기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풍부한 자료가 공개되면서 전후 미국이 아시아에 개입한 상황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점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게 됐다. 그런 자료를 소화한 뒤 미국과 관련해 어떤 결론을 내리든, 극비 문서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민주 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독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이는 개인이 알 권리를 지닐 뿐 아니라 사람은 자기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진보적 신념이다. 이 자료들은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오랜 정책을 뒤집었고, 자국의 안보와 관련해 한반도를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한국 문제를 다룰 전형적인 국제적 방식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후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미국이 생각한 4대 열강의 다국적 신탁통치다. 여러 세력을 관련시키고 다양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 뒤 미국의 한국 정책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었고, 그런 생각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의미한 유엔군 사령부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흐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대립하기보다는 방해하거나 반란 충동을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교차적 방법으로 상대를 제한하고 억누르려는 반공적 의도도 있었다. 상대는 물론 스탈린이었고, 그 정책은 소련을 강대국의 하나로 만들려는 그의 욕망을 면밀히 고려했다. 그러나 한국의 혁명적 민족주의를 염두에 두지 않아 실패했다. 소련인이 아니라 한국인 혁명가와 맞닥뜨리면서 미국에서는 국제협력주의자가 물러나고 자국중심주의에 입각한 정책이 나타났으며, 공산주의에 맞서는 방벽을 한국에 세우려는 일방적인 조치가 추진됐다. 이런 흐름은 봉쇄와 대결 전선을 형성하고 반공사회를 만들 수 있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자국중심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물론 이것은 세계 규모의 냉전이 진행됐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한국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매우 일찍-일본이 패망한 지 석 달도 지나기 전에-나타났다는 것이다. 1945년 9~12월 미군정은 일본이 만든 총독부와 경찰 제도 그리고 거기 소속된 한국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남한에서만 국방경비대를 출범시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추진한 통상적 절차였고, 미국의 기존 정책과 곧잘 상반된 방향으로 진행됐다. 한국 점령 정책이 일본 점령 정책과 닮은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마지막 측면이었다. 이 점을 제외하면 1948년 “역진 정책reverse course”으로 선회하기까지 미국의 일본 정책과 완전히 대조적이었고 때로는 급진적 양상을 띠기도 했다. 역진 정책은 한국에서 즉각적으로 추진됐다.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이 지지했든 소련과의 협상에서 타결됐든, 점령 초기 몇 달 동안 일어난 사건은 한국의 분단을 해소할 미래의 가능성을 크게 왜곡하고 편향시켰다. 그 이유는 다른 방식이나 더 나은 방법을 추진하려면 1945년 마지막 석 달 동안 했던 조치를 번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그 결과 이 시기에 미국의 한국 정책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굳이 독립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수의 한국인을 빼면, 이런 중요한 선택은 한국인의 염원이 미국의 구상과 거의 언제나 상충되는 혼란 속에서 이뤄졌다. 노동자·농민·학생과 일제에 동원됐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에게 해방체제는 싸워 지킬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의 참여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됐다.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인구 변화와 농업 분쟁이 함께 일어난 지역에서 그리고 지리적으로 조직이 뿌리내릴 시간이 충분했던 지역에서 소요가 가장 심했다. 반면 북한은 고요한 섬이었다. 소련의 정책은 좌익 한국인의 전면적 참여와 지휘 아래 철저하지만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은 사회혁명을 지원했다. 규율이 잡히지 않은 광란의 첫 시기가 지난 뒤 소련은 한국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배후로 물러났다. 단기적으로 보면 효율성 있고 비용이 적게 드는 상당히 성공한 정책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소련은 자신의 의도대로 유순한 위성국을 만드는 데 실패했는데, 현재 일부 동유럽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이것은 소련이 항일 투쟁에 몸담고 소련의 통제를 거부한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을 후원한 결과였다. 이와 관련된 사항은 2권에서 좀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최근 이용할 수 있게 된 북한 관계 자료는 1947~1950년의 기간을 살펴보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1권에서는 수도와 좀더 많은 인구가 있는, 세계 최강국이 점령한 1945년 직후의 남한을 주로 다룬다. 해방 직후 중요한 사건은 남한에서 좀더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북한의 정치 형태는 첫해부터 남한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남한의 좌익 정치를 파악하면 북한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다. 2권에서는 1947~1950년을 다룬다. 이 기간에 한국 정치와 사회 세력은 근본적이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이번에는 유엔과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한국 정책을 지원함으로써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앞선 정책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누가 봐도 취약한 이 정부와 지도자 이승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 군대는 철수했고 두 나라의 관계는 서먹서먹해지기도 했다. 미국이 남한을 보호하겠다고 한 약속에 의문이 제기됐으며, 그것은 남한 정부를 길들이는 데 이용됐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이 정부가 해방 뒤 미국이 추진한 정책의 결과이자 책임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후 아시아에서 수립된 다른 어떤 정부보다 훨씬 더 미국다운 작품이었다. 남한에는 강력한 우익 대중 정치가 나타나 북한에서 쫓겨나고 핍박받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으면서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의 관계도 바뀌었다. 북한에서는 좌익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평화통일의 가능성은 물거품이 됐다. 1947년 소란스러운 여름이 지나간 뒤 남한에서 좌익은 거의 소멸됐지만, 앞서 인민위원회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을 거점으로 자생적인 유격전이 전개됐다. 이런 내부 갈등은 산악 지역과 제주도 전체를 휩쓸면서 독특한 전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남한 반란 세력은 그에 호응해 세력을 확장했다.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은 일본군에서 복무한 북한 출신 장교들에게 주요 군사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반면 북한에서는 중국 내전에서 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수만 명의 병사를 흡수해 만주부대를 중심으로 군대를 확대했다. 유격전은 1949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38도선을 따라 교전이 벌어지면서 중단됐다. 그러나 이런 국면은 남부 빨치산의 실질적 패배와 함께 끝났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남북 갈등이 재래적인 군사적 방식으로 치닫는 전조였다. 대규모 재래전의 효율적 장점은 1949년 중국 내전의 최종 단계에서 또렷이 나타났는데, 한국의 갈등도 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양쪽이 재래적 방식의 공격을 위해 각자 후견국의 지원을 받으려 애쓰면서 1950년 초반 기다림과 시험의 기간이 이어졌다. 또한 1권에서는 냉전의 기원이 한국 문제 안에 잉태되어 있었다는 여러 증거를 검토한다. 미·소의 전형적인 냉전 관계는 종전 뒤 아시아에서 미국이 소련과 직접 맞선 유일한 나라인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봉쇄containment 정책은 비록 워싱턴의 승인을 얻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추진됐다. 해방 뒤 첫해 중대한 몇몇 시점에 서울에 있던 봉쇄론자들은 존 J. 매클로이, 에이버럴 해리먼, 조지 케넌 등의 지지를 얻었다. 1945년 한국은 미국에게 중요하지 않은 변두리였지만, 훗날 다른 나라와 지역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서울의 미군정청이 추진한 모험적이고 선제적인 정책은 워싱턴의 동요와 비난을 불러일으켰지만, 끝내 호의와 지지를 얻었다. 지휘권을 쥔 쪽은 워싱턴이 아니라 서울인 것 같았다. 달리 말해 1945년이나 1946년 무렵 워싱턴에서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한 것은 1947년이나 1948년이 되자 선견지명이 있는 통찰로 평가됐다. 물론 1950년에 감지된 소련의 한국 침략에 맞서 워싱턴의 대응이 전 세계적 규모로 전환되면서 한국은 전면과 중심으로 이동했고 긴박감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무력 충돌 및 그 결정과 관련된 영향력은 처음부터 미군정이 가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시아 혁명과 관련해서도 한국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45년 한반도의 혁명적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소련과 미국이 진주하지 않았더라도 혁명은 몇 달 안에 한국을 엄습했을 것이다. 풍부한 경험을 지닌 지도자가 많이 포진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졌다. 특히 남한의 토지 문제는 혁명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베트남 유형의 공산주의가 형성되지 않았고 남한에서는 끈질긴 반란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은 1권의 또 다른 주요 목표다.

2권, 폭포의 굉음 1947~1950

1947년 초까지 한국과 그 내부의 분쟁이 사건의 과정을 좌우했다. 한국에서 냉전은 1945년에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 전개된 미·소의 긴장과 한국의 사회·정치적 움직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전개되면서 미숙한 봉쇄 정책도 시작됐다. 1946년 중반 사실상 두 국가는 경계선으로 굳어져가고 있던 38도선의 방어물에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커지면서 경쟁을 강화하고 확대했다. 미국의 전면적 관리를 받는 남한만의 단독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해방된 이듬해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으며 미국의 정책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섰다. 가을 봉기에 대한 탄압은 식민 정부의 가공할 강압적 측면을 보여줬으며, 한국 정부의 관료들에게는 생명의 호흡을 줬다. 그때까지 사태를 지배해온 남한의 좌익은 세력을 잃고 활동의 중심을 평양으로 옮겼다. 1947년 중반 여운형은 사망했고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종속됐다.
1947년 초 트루먼 독트린과 일본의 산업부흥은 전체적인 중심을 이동시켰고, 그 뒤 3년 동안 외부 세력은 한국의 정세를 좌우했다. 한국의 봉쇄 정책은 그리스와 터키뿐 아니라 한국도 “방어선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한” 애치슨의 결정을 미리 보여줬으며 고위층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하지의 우려가 아니라 거대한 초승달 지대라는 정치·경제적 상황이었다. 이는 마셜 플랜을 유럽에 적용하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루스벨트적 국제협력주의 수사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미국을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세계에서 점차 일방적인 역할을 하는 세계의 패권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세계관이 동아시아 지역에 표출된 결과였다. 미국에게 한국의 중요성은 커져갔지만, 소련은 군대를 철수했으며 김일성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 자신의 부대를 파병했다.
봉쇄 정책이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반격 전략이 나타났는데, 그것의 운동법칙은 쇠락하던 앞 세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했으며 다국적기업보다는 개인 사업가나 국내 자본가에게 친화적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팽창주의를 표방했으며 선호한 전략은 반격이었다. “외교정책”은 초강대국인 미국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외교정책을 담당한 정부 기관은 일반 사회에 대해 거의 완전한 자율성을 가졌다. 당시 외교정책에 관심을 가진 부류는 귀족 혈통으로 미국 동부의 명문대를 나와 국무부 외교국에 근무하던 인물들로 실제로는 미국 동북부와 남부의 지역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무역업자, 남부의 농장 경영자, 월가의 투자자들은 외교 문제의 배후에 있는 “특수 이익집단”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공업 수출업자라는 새로운 패권 세력이 형성됐으며, 1940년대 후반에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가 급증하면서 평균적 미국인과는 거의 무관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전개됐다. 그러므로 1차 한국전쟁과 2차 한국전쟁의 원형이 된 사건들은 1년 전, 즉 미국 정부 안에서 반격의 주장이 비등하고 미군의 마지막 전투부대가 한국에서 철수한 시점에서 형성되었다.
이처럼 반격을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진 까닭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이라는 상위구조의 존재로, 중국의 공산혁명 덕분에 보수파가 1948년 선거와 뉴딜에 설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재기한 일본이라는 정말 중요한 장치였는데 그 장치가 있던 지역의 정치·경제가 대부분 공산 세력의 지배 아래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계의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 세력은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한 딘 애치슨의 6월 결정을 단합해 지지했으며, 그 뒤에는 서로 다른 이유에서 북진에 합의했다. 전자는 압록강에서 멈추기를 바랐지만, 후자는 중국이라는 미지의 황야까지 진격하려고 했다. 중국과 실제로 부딪쳤을 때 그들의 결속은 깨졌다. 반격 전략과 이전부터 그것을 지지해온 세력은 현실을 떠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회고주의의 망각 속으로 옮겨갔으며, 봉쇄는 외교정책을 이끄는 지도층의 기본 선택지가 됐다.
한편 한국인이 사태의 진전을 장악하는 수단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한국에서는 일종의 운동 법칙이 나타났다.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과 유엔의 승인을 받고 거리에서 청년을 대규모로 동원해 세력을 강화했지만, 온전한 과정을 밟지 않은 경제는 악화됐다. 김일성은 소련제 장비와 중국식 훈련으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기 1년 전 귀국시켰다. 북한은 (공산주의적) 수입 대체 공업화를 추진해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기반을 건설한다는 우선적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식민지 시대에 도입된 중공업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9~1950년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격대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보여줬다.
수확량이 늘어나고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형성되면서 경제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한반도 안의 문제였고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립의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 그 전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몇 사람과 김석원을 중심으로 한 몇 사람이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남한을 변화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한국의 사회구조에 필요했지만 그 이전 5년 동안 실현되지 않은 혁명과 동일했다. 그 혁명은 자본주의적 혁명이었다. 전쟁은 지주제를 종결시키고 강제적 관리(국가 예산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국가를 해방시킴으로써 변혁의 기간을 단축하고 가속화했다.
부유한 지주계급은 국가에 깊이 침투해 발전을 저해하고 관료 기구를 마비시켰다. 지주가 장악한 국회는 행정 권력을 외부에서 견제했다. 조병옥과 장택상처럼 굳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들은 지지자들과 함께 정부의 강압적 기관을 장악했다. 한국 지주계급의 저물어가는 권력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완고한 후진성 그리고 한국에서 전개된 계급 투쟁의 기본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실은, 세계 최강국이 자신들을 위해 끔찍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권리, 즉 남한과 북한에 있던 사유재산을 다시 확보하려고 완강히 버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전쟁의 목적이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1950년 여름 북한이 이 계급을 숙청하고 지주를 토지에서 분리시켜 미국인의 처분에 맡기고 나서야 토지 재분배가 이뤄졌다
한국전쟁이 한국인에게 총력전이었다면, 미국인에게는 자국의 패권을 구축하고 재편하는 계기였다. 애치슨이 말한 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1954년 애치슨은 회고록 집필을 돕고 맥아더의 위상을 약화시킬 목적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다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
애치슨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냉전 사료인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을 언급하며, 한국은 그 문서에서 요구한 거액의 국방 지출을 가능하게 만든 필요한 위기였다고 지적했다. 좀더 넓게 말하면 한국은 20세기에 미국이 추진한 국가 건설의 두 번째 물결을 가능하게 만든 위기였다는 것이었다. 뉴딜이 첫 번째 물결이었고 안보 국가가 두 번째 물결이었으며, 관련된 관료 조직은 1950년대 초부터 급격히 커졌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대외적으로는 패권을, 대내적으로는 국가 건설을 추진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패권을 구축하는 데 좋은 기회였다는 것은 이제 연구서, 적어도 관련 학술서에서 일반적인 견해다. 한국이 봉쇄 정책의 세계화를 야기해 케넌의 제한적 봉쇄를 니츠와 덜레스의 무제한적 개입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이 일반적 논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패권의 구축과 재편을 논의했으며 “재편”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역사를 발견했다. 또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에는 봉쇄의 세계화만 있던 것이 아니며 봉쇄와 반격 사이의 변증법도 다뤘다. 국가안보회의 문서 48은 중국의 공산혁명과 일본 산업 부흥의 시작을 해석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해온 아시아 정책의 철저한 재평가가 끝났음을 시사했다. 거기에도 봉쇄와 반격 사이의 동일한 변증법이 보인다. 8월 하순 트루먼과 애치슨은 북진을 결정하고 워싱턴은 맥아더의 진격에 광범한 지지를 보냈다. 1947~1950년 위태위태하게 지속되어오던 봉쇄와 반격을 둘러싼 절충의 움직임은, 아시아에 대한 초당파적 협력의 결여와, 무엇보다 새로운 패권을 뒷받침할 재원이 부족한 채로 1950년 8월 하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약 두 달 동안 진행된 북진 과정을 거치며 타협에 가까워졌다. 반격 정책은 재편된 조선인민군과 20만 명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반격을 받아 전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으며, 그 결과 워싱턴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확전을 중단했다. 1950년 겨울, 애치슨과 니츠 같은 중도파는 봉쇄 정책을 추진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국어판 서문 발췌

나는 당초 두 권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1940년대 후반의 한국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두 권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는데, 1947년은 미국 정책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냉전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딘 애치슨은 그 독트린을 한국을 방어하는 데까지 확장하려고 했다. 나는 이것을 1947년 1월에 작성된 다른 자료에 스테이플러로 첨부된 수기 메모에서 처음 봤는데, 거기서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것을 일본 경제와 연결시키라고 애치슨에게 지시했다. 이것은 완전히 수정된 일본 정책의 일부였는데, 일본 인접 국가들의 산업을 복구하는 방침을 철회하고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력을 박탈하되 경제적 거점으로 다시 복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었다(이것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77년 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었는데, 한 직원이 큰 손수레 가득 골판지 상자를 싣고 가면서 내게 그 안에 든 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242 기록군Record Group’인 ‘노획 문서’였는데, 1950년 가을 미군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수집한 출판물과 극비 자료의 보고였다. 갑자기 내 연구 주제가 내 앞에 펼쳐졌다. 이를테면 1940년대에 발간된 『노동신문』은 북한 바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사본이 없었지만, 이 문서에는 그 공식 기관지가 거의 다 들어 있었다. 2년 넘게 이 자료들을 읽으면서 북한에 대한 내 이해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1권에서는 기존의 미국 비밀문서와 1940년대 후반 남한에서 간행된 자료를 주로 이용했지만 이제 나는 어떤 기록 보존 담당자도 볼 수 없었던-그들은 그 언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CIA와 그 밖의 정부 기관이 오랫동안 이 문서들을 간헐적으로 삭제한 정황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것은 1951년의 자료를 손에 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글을 쓴 미국 학자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읽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은 242 기록군에 흥미로운 것이 있느냐고 내게 뻔뻔스레 묻기까지 했다. 당신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두 가지 신념은 내가 이 책들을 쓸 때보다 더 깊어졌다. 첫째는 특히 군대와 경찰에서 일본에 협력한 거의 모든 한국인을 다시 고용하기로 한 미군정의 결정이 무엇보다 가장 압도적이고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1945년 한국인 항일 유격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대좌였던 김석원이 1949년 여름 내내 38도선의 지휘관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북한 지도부는 거의 모두 항일 유격대원 출신이었다. 또는 이것을 생각해보라. 일본군 장교이자 서로 좋은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로 졸업했다. 그들은 박정희와 김재규다. 그 뒤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협력했던 장교들을 다시 채용하면서 되풀이한 이 근본적인 오판은 식민지에 반대한 투쟁을 거쳐 건국한 미국이 20세기 중반 무렵 그런 지향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신념은, 1945년에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매우 중요했지만 한국전쟁 관련 문헌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돼왔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좀더 깊이 인민위원회를 연구하면서,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3년 동안 평화롭게 존속했지만 섬 인구의 적어도 10퍼센트가 끔찍하게 학살된 수치스런 유혈사태로 끝났고 그 학살은 미국인과 앞서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장교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누구나 곧 북한이 한국인 대다수가 반역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
를 확보할 방법을 찾으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2권을 완성하고 몇 년 뒤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문서가 기밀 해제됐다. 내가 이 문서의 내용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상당히 빠르게 쏟아졌다. 그 문서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 소련이 더 강력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줬다. 242 기록군을 토대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북한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잘못이었다. 북한이 그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 스탈린은 너무나 엄청난 인물이었다. 소련이 이 전쟁에 참전하려 하지 않았다는 내 주장은 옳았다. 내가 살펴본 정보자료들에 따르면 개전 이후 소련 잠수함들은 한국 해역에서 신속히 퇴각했고, 조선인민군 군사 고문들은 철수하거나 귀국했으며, 1950년 후반 북한이 가장 큰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스탈린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중국이 참전한 부분적인 이유는 동북부의 자국 산업시설을 보호하고 이르면 1920년대부터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수만 명의 한국인에게 보답하는 데 있었다고 나는 주장했다. 중국 학자들이 많은 새 문서를 바탕으로 한국전쟁과 관련된 뛰어난 저서를 여럿 냈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판단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음모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음모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갖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보듯 그것을 입증할 사실은 거의 없다.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문서로 작성된 몇 가지 음모가 교차됐기 때문에 독자들은, 특히 2권을 읽으면서, 많은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서보관소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자료를 분석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논저에서 그 자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이를테면 장제스를 실각시키려는 미국의 쿠데타 계획-나는 그 증거들이 이런저런 문서보관소에서 묵혀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증거가 있는 한 특정한 이야기를 따르기로 했다. 이 방법도 특정한 문서를 기밀 해제하지 않는 미국 당국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모든 작가가 바라는 탐구심 있는 독자들에게 봉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나는 1945년 이후 이 유서 깊은 나라를 경솔하고 분별없이 분단시킨 미국의 고위 지도자들(당시 존 J. 매클로이보다 더 ‘고위’ 인사는 없었다)이 촉발한 분열에 나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생산된 미 국무부의 많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유격대 출신의 한국인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에 들어갔고, 이제 그들은 그런 유격대의 후계자들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평양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이것보다 실패한 정책은 생각하기 어렵고 해결책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는데, 내 개인적 견해가 어떻든 남한이나 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다는 뜻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면밀한 역사적 탐구가 두 한국이 누려야 할 화해로 가는 최선의 처방이자 방법이라 믿고 있고 늘 그렇게 믿어왔다.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이 경우 진실은 주요 문서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역사의 배우들은 자신이 대중에게 한 말과 곧잘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내 ‘견해’를 자주 묻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책에서 이전의 기밀문서에 대한 내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언젠가 누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권리가 있지만 자신의 견해를 사실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준 한국인들에게 감사하면서 1권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어를 배워 읽을 수 없었다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두 책 모두 한국어로 충실히 번역돼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

작가정보

(Bruce Cumings)
194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출생. 1965년 데니슨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석사, 197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7~1968년 서울에서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으로 일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75~1977년 스워츠모어대학 조교수를 시작으로 1977~1987년 워싱턴대학, 1987~1994년 시카고대학, 1994~1997년 노스웨스턴대학 교수를 지낸 뒤 1997년부터 시카고대학에서 석좌교수 등으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예술·과학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앞으로 나올 『케임브리지 한국사』의 현대사 부분 편집장을 맡고 있다.
주저인 『한국전쟁의 기원』 1권으로 미국 역사학회의 존 킹 페어뱅크 저작상John King Fairbank Book Award, 2권으로 국제연구협회의 퀸시 라이트 저작상Quincy Wright Book Award을 수상했으며 김대중 학술상(2007), 제주 4·3평화상(2017)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기원』 1·2(1981, 1990) 외에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1997. 김동노 외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2001), North Korea : Another Country(2004. 남성욱 옮김, 『김정일 코드』, 2005), The Korean War : A History(2010.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2017) 등이 있다.

번역 김범

1970년 서울 출생.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다. 조선전기 정치사를 연구해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사람과 그의 글」, 『민음 한국사-15세기』(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팔레), 『조선왕조의 기원』(존 던컨), 『무신과 문신』(에드워드 슐츠), 『조선의 변방과 반란, 1812년 홍경래 난』(김선주),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김기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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