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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계절의 처음

시인동네 시인선 247
김정희 지음
시인동네

2026년 01월 12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02월 1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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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PDF (0.52MB)   |  124 쪽
ISBN 979115896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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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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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시와경계》로 등단 후 시와 소설 그리고 디카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정희 시인의 첫 시집 『다음 계절의 처음』이 시인동네 시인선 247로 출간되었다. 김정희의 시집을 읽는 독자라면 이 시집의 전체 프레임이 죽음에 대한 의식에서 시작하여 시간성과 기재성에 대한 사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서사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김정희의 시적 여정이 의식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무의식(꿈)의 세계에서도 지금까지 있어 온 시간을 반추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김정희에게 시를 쓰는 시간은 꿈을 꾸는 시간이다. 김정희는 시간 여행자로서뿐만 아니라 생활 여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음 계절의 처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제1부
아아ㆍ13/고비로 가는 여자ㆍ14/돼지와 꽃ㆍ16/도플갱어ㆍ18/변태들ㆍ20/쌍욕ㆍ23/아버지와 화석ㆍ24/천천한 사랑ㆍ26/십자수 표구ㆍ28/디지털포렌식ㆍ30/엑스트라ㆍ32/허공을 박다ㆍ34/밤의 활강ㆍ36

제2부
백날ㆍ39/단속구간에 갇히다ㆍ40/그 많던 해파리는 어디로 갔을까ㆍ42/흐르는 소나기ㆍ44/흐린 날ㆍ47/갈라파고스로 가자ㆍ48/아라비안나이트ㆍ50/이슬비에 대한 예의ㆍ52/오월의 마늘밭ㆍ54/어쩔 수 없는 일ㆍ55/나이 팔기ㆍ56/사춘기는 아직 오고 있는 중ㆍ58/실종ㆍ60

제3부
휠체어와 봄ㆍ63/그리움은 지하 2층 주차장에도 있다ㆍ64/그녀의 아스피린ㆍ66/떠다니는 꿈ㆍ68/언니와 동화ㆍ70/통천문(通天門)을 생각하다ㆍ71/내 동창 창호ㆍ72/햇빛 사냥ㆍ74/면회ㆍ76/그림자의 정체ㆍ78/소녀와 방ㆍ80/이혼유정(離婚有情)ㆍ82/투신ㆍ84

제4부
노인의 바다ㆍ87/내 집에는 악어가 산다ㆍ88/장어는 마지막 힘을 왜 꼬리에 옮겼나ㆍ90/그 겨울 달ㆍ92/남지 오일장ㆍ94/까맣고 작게ㆍ95/어부바ㆍ96/비밀번호ㆍ98/고등어 굽는 동안ㆍ100/환생ㆍ102/낮달ㆍ104/이상한 결론과 물음ㆍ105/마주치다ㆍ106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ㆍ107

책갈피에 꽂아둔 영아,
나는 세상 제일 아까운 게
아아를 사 먹는 거야
왜,
한번 쭉 빨아댕기면 얼음만 남아

단란한 가정에 성실한 남편에 곱디고운 두 아들과 따뜻한 집을 두고 베풀 줄도 알아 그래서
나는 아아가 좋아
한번 쭉 빨아댕기면 얼음만 남는
너 앞에서 나는 망설이지 않아

얼음만 남아도 아아를 채워줄 수 있는
네가 더 잘 살면 좋겠어
나는 아아를 사 먹을 수 있어
폐부 깊숙이 아아를 빨아댕겨도 아깝지 않아
아아는 비워지지 않는 리필이야
나는 아아가 좋아
- 「아아」 전문


12시간 수술 후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은 사라졌다고
잠시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좀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음날 부고가 왔다 부검은 없었고 장녀를 아꼈던 아버지 옆에 하얀 단지 하나로 놓였다 가장 예뻤던 시절의 이미지와 함께 비어 있는 장례식

떠난 여자의 전화기 속
카톡이 울고 문자도 울었다
전화번호, 주민번호, 고인이 된 부모의 생일
M, Z, I, Σ, ∃ 등
남은 인연에 대한 여자의 정보가 동원되었고
비밀번호는 속수무책

초기화를 시키면 생전의 정보는 사라진다
남편이나 자식 그 흔한 애인도 없이
풀리지 않는 전화기에 울리는 메시지는 창업 소개, 투자나 보험 권유, 비데나 정수기 청소 문자 등
만나지 않을 인연들

향 하나로 남는 생. 그녀의 냄새는 어땠을까 정종 잔을 세 번 돌린다 그 짧은 순간 어쩌면, 그래도 전화기 속에 남은 인연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를 판도라 상자를 충전하는 것이다
- 「디지털포렌식」 전문


목욕 바구니 끼고 돌아가는 길
젖은 몸에 비 내린다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 맞아줄 수 있다
통째로 나를 맡길
젖음이 있다는 것이 어디냐
이대로 팔을 뻗으면
길 늘어진 저 끝 어디쯤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소에
미끄럼틀에
그네에
젖음을 나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오는 동안
젖는 것을 생각했다
삶의 비듬이 깃털이 되면
잠시라도 날아오를 수 있을까
뜨거운 욕조의 하얀 새는
금세 땅으로 내려앉곤 했는데
반환점을 도는 일은
다시 하얗게 되는 것
멀어지는 집을 잡아당기는 것
뻗은 팔을 접으며
비밀번호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르는 것
이슬비도 내게
흠뻑 젖었다
- 「이슬비에 대한 예의」 전문


간혹 나뭇잎 위에 서 있곤 한다
천공 뚫은 전봇대 위거나 꿈속이거나 빛이라곤 들지 않는 대밭에서 지네의 젖은 울음소리를 듣거나 저수지 밑 가라앉은 낚싯배를 응시하거나 빙의 환자처럼 까딱까딱 앞으로 뒤로 까딱까딱 흔들리거나

냇가에는 숟가락이 빠져 있고 오래전의 엄마가 밥상을 엎고 나는 순간이동을 한다 폐경이 언제 적이었나 낳지 않은 아이를 고쳐 업으면 아이는 울지 않고 띠는 흘러내리지 않는다

퍼뜩, 눈을 뜨면 저벅저벅, 쉴 틈 없이 꿈이 걸어온다 술에 절어 다리에 누운 아버지 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던데 심장이 차에 깔린 아버지가 말한다 민들레처럼 앉아봐 검은 장대가 받쳐줄 거야 뿌리 같은 거 내릴 생각일랑 행여 마

나뭇잎 위에서 뛰어내려야 발을 디딜 텐데, 까딱까딱 왜 이리 흔들리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어떤 곳, 어제와 오늘의 중간 어디쯤에서 꼭대기, 저 꼭대기 끝 나뭇잎은 자꾸만 나를 흔들고 나는 아이가 떨어질까 봐 띠를 고쳐매고 있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꿈이 점점 늘어만 간다
- 「떠다니는 꿈」 전문


큰아이가 방을 달란다
혼자 있고 싶단다
누구든 그럴 때가 있지
쪽방에서 가지는 자신과의 밀회

반짝이는 시간 담길 포장지 접히는 동안,
혼자 견뎌야 할 일이 낯설 무렵,
누구든 저들만의 쪽방에 갇혀 있음을 알았을 때
영원의 공간에서
영원한 방을 소유하게 된 너를 발견하게 될지도

채팅과 게임에 빠져 있는 너에게
가끔 과일과 주스를 들고
방문을 두드린 이 엄마도
나만의 쪽방에 갇혀 바깥을 힐끔거린 날 있었지

혼자가 되어보렴
누구든, 정말 잠시만이라도
저를 가둘 쪽방 필요한 법이니
너의 방 두드릴 누군가 있던 그때가
희망이었음을 알 수 있도록……
- 「소녀와 방」 전문


[시인의 산문]

친구 병문안을 갔다. 병원 내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에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동안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반씩 나눠 마셨다. 검고 뜨거운 김을 들이마신 까닭인지 친구는 밭은기침을 했고 나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기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뜬금없이 친구에게 물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여 과거의 어느 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기회를 준다면 언제로 가고 싶니? 우습게도 우리 둘의 시점이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살면서 이런 친구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퇴원 후에 수원지를 걷기로 약속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참 좋다.

[해설 엿보기]

김정희의 시간성을 지배하는 정동(affect)이 있다면, 그것은 울음이다. 프로이트가 “정동은 성찰하거나 사유한다기보다는 행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울음은 정서가 아니라 내장에서 스며 나오는 소리이며,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손등을 뒤집으면 붉은 손바닥
푸릇한 잎사귀 달던 잎맥 같은 실금들
네게 가는 길이 이랬을까
걸핏하면 신호등에 걸리고
60km 제한속도 표지판을 세우고
방지턱은 복병처럼 엎드렸지
나는 두 손을 쥐고 울었어
4월 벚나무 아래는 너무 하얘
두 손가락 그러쥐던 그날처럼
- 「그리움은 지하 2층 주차장에도 있다」 부분

시인에게는 “네게 가는 길”이 있다. 이 작품에서 “네”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으로 가는 길이 “실금들”처럼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가는 길에 방해물이 “복병처럼” 가득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정희를 읽어온 프레임을 적용하면, 이 시에서 “신호등”과 “방지턱”은 본래적 존재의 탈은폐를 방해하는 다양한 장치들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들이다. 김정희가 기재성의 시간을 반추할 때도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물들과 사건, 사고들이 등장한다. 미래의 죽음에서 과거로,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성의 궤도에서 시인은 “두 손을 쥐고” 자주 운다. 시인에게 울음은 추상화된 기억이 아니라 내장에 각인된 정동이다. “4월 벚나무 아래”에서 “두 손가락 그러쥐던 그날”은 기재성의 시간에서 시인이 온몸으로, 내장으로 겪는 슬픔의 시간이다. 눈물은 “지하 2층 주차장”만이 아니라 “오월의 마늘밭”(「오월의 마늘밭」)에서도 자꾸 흐르고, “갈라파고스”(「갈라파고스로 가자」)에서도 흐르며, “호프 한 잔에 아스피린을 삼키”(「그녀의 아스피린」)는 여자의 얼굴에서도 흐른다.
그렇다면 김정희의 시에서 눈물은 어떻게 마르는가. 그것은 바로 눈물의 계곡에 빠진 존재들의 시간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늙은 여자가 더 늙은 여자를 밀고 간다
더 늙을 일이 없는 여자와
늙을 일이 조금 남은 여자는 다정하다
늙도록 익숙한 길
더 늙은 여자의 어깨 위에
조금 늙은 여자가 손을 얹는다

수국은 별을 닮았구나
우주별이 내려온 줄 알았구나

보라에 희고 붉은 길의 끝으로
휠체어가 굴러간다
이 길을 돌면 다음 길이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듯 오래전에 알았다는 듯

두 여자 다음 계절의 처음으로 걸어간다
거의 왔구나, 하면서
- 「휠체어와 봄」 전문

시간의 긴 궤도 위에서 “늙은 여자가 더 늙은 여자”가 가는 길은 같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모든 존재는 시간성의 고비마다 “이 길을 돌면 다음 길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길의 끝이 어디인 걸 잘 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의 미래라는 동일한 길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늙은 여자’는 ‘더 늙은 여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아픔의 휠체어를 다정하게 밀고 간다. 만일 이 둘이 가야 할 길이 다르다면, 그 누구도 이런 공감과 사랑의 정동을 보장할 수 없다. 하나의 아픔이 다른 아픔을, 하나의 눈물이 다른 눈물을 밀고 가다가, “다음 계절의 처음”에서 이들이 내뱉는 말-“거의 왔구나”-은 얼마나 정겹도록 슬픈가. 김정희는 은폐되어 있는 본래적 존재를 시간의 지평을 통하여 드러내는 시적 여정의 먼 길 위에 서 있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인물정보

저자(글) 김정희

시인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2013년 《시와경계》 시 등단, 2013년 《경남문학》 소설 등단했다. 디카시집 『슈뢰딩거의 고양이』, 시집 『다음 계절의 처음』이 있다. 현재 《시와경계》, 《디카시》 편집장을 맡고 있다.

작가의 말

젖은 모래를 쥐고 삽니다.
손바닥과 손등, 손톱까지 끼어서.
포슬하게 말라 나를 떠나게 되면 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겠지요.
언젠가는, 하고 다짐해 봅니다.

2025년 1월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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