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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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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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이자 호주 로위연구소에서 이민정책실장을 거쳐 현재 재호한인을 연구 중인 호주국립대학교 송지영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최초의 한인 이민자 존 코리아의 발굴부터 시작해 호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민 1세대부터 현재 워킹 홀리데이 중인 젊은 청년들까지 인터뷰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폭 넓은 현장 연구를 정리한 이 책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총 6장으로 구성돼 있다. 19세기 말인 조선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근 10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가난, 독재, 차별, 교육 등 자기 자신 혹은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호주로 떠나 정착한 이들의 이야기를 시대순으로 엮었다.
《이민의 진화》는 최초의 한인 이민자 존 코리아를 찾아낸 연구부터,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난리 속에서 자의 혹은 타의로 나라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리고 세계여행 자유화와 호주와 체결한 워킹 홀리데이 등의 시대적 변화가 이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살펴본다.
이민 연구에 있어 핵심은 바로 ‘배출 요인’과 ‘유입 요인’이다. 배출 요인은 왜 국가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자의 혹은 타의로 떠나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을 말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가난과 식량 문제가 가장 큰 배출 요인이고, 지금은 차별, 경제적 한계, 교육 등이 주된 배출 요인이다. 유입 요인은 해당 국가로 유입하게 되는 긍정적 요소를 뜻한다. 근로 조건, 비전, 거주 및 자연 환경 등이 포함된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청년들이 느끼는 배출 요인과 유입 요인은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이민의 진화》는 호주 이민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의미 있는 작업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굴곡과 사연이 깊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종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기록이다.
1부
1장 호주 최초 이민자, 존 코리아
최초의 재호한인을 발견하다│호주 입국과 시민권 획득│생계를 위한 끈질긴 도전│미스터리한 유서│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존 코리아
2장 호주 최초 유학생, 김호열
호주로 향한 한인 유학생│왜 김호열이었을까?│호주를 혼란스럽게 만든 초국사적 존재│멜버른대학교 캠퍼스 생활│이민의 촉매자
3장 한국 전쟁을 피해 연합군의 나라로
호주군의 마스코트 보이에서 호주 시민권자로│전쟁과 결혼│전쟁고아 입양인│한국 전쟁이라는 위기와 이민
2부
4장 베트남 전쟁에서 시작된 사슬 이민
타국의 전쟁터에서 호주로│베트남에서 호주로 향한 또 다른 이들│생존 욕구에서 시작된 청년 이주│남미에서 호주로 2차 이주│사슬 이민의 어두운 모습
5장 조기 유학이 만드는 갈림길
한국에서 호주로 향한 혜린│호주에서 한국으로 향한 로제│환경과 이주의 관계│다양해지는 한인 청년의 이민 형태│두 나라를 자유자재로, 왕복 이민
6장 워홀러에서 영주권자로
한국인의 호주 워홀 현황│호주 오렌지 농장의 한국인 매니저│회계학을 전공한 육류 가공 공장의 청소부│워홀러가 유의해야 할 것들│이민이 만드는 진화
맺음말 이민은 사회와 국가를 진화시키는 도구다
감사의 말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로 나라를 잃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으로의 파병, 군부 독재를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얻은 자유와 세계화로 빠른 발전을 이뤄냈다. 이 과정 속에서 국경을 넘었던 한인 청년들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_5쪽 〈머리말: 그들은 왜 국경을 넘었을까?〉 중
이주와 이민은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이주migration는 이민immigration보다 넓은 개념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뜻한다. 취업이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하거나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단기 또는 계절 이주(특정 계절마다 특정 직업을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수확기에 추수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단기간 고용하는 형태)가 포함된다. 이민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영구적인 정착 또는 장기간 거주를 위한 이동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이주와 이민을 연구할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가 상이하다. 국제 이주 연구에 있어서는 국가 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별 원인과 조건, 출입국 국경 관리, 비자의 종류 등을 보는 반면, 국제 이민 연구는 영구 정착이라는 목적 하에 현지에서의 적응, 시민권 획득, 인종차별 및 정체성 문제를 주로 다룬다. 이주와 이민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민의 경우는 일부 인도적 이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주자의 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된다고 볼 수 있다. _12쪽 〈머리말: 그들은 왜 국경을 넘었을까?〉 중
다른 나라에 영구 정착하기 위한 이민 역시 다양한 이유로 결정된다. 인도적 이유로 인해 출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안전한 나라에서 영구 정착을 희망하는 사람은 난민 절차를 선택하고, 경제적 혹은 가족과의 결합이 목적인 사람은 고용주나 배우자의 도움을 받아 영주권을 신청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민 희망자가 일정 금액을 투자하면 영주권을 발급해주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이민자를 얼마만큼 수용할지는 각 국가가 정한다. 호주는 필요한 직업군을 선정한 후, 대략 75퍼센트는 경제 이민, 20퍼센트는 가족 이민, 10퍼센트 이내는 난민 및 인도적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 대부분의 청년 이민자는 40세 미만으로, 활발한 경제 활동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이며 상당한 금액의 세금을 내고 있다. 정착국에 있어 청년 이민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들 대부분 이 이민 과정에서 혹은 그 이후에 해당 국가의 시민을 출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획득한 청년 이민자들은 정착국이 정한 엄격한 기준과 심사에 합격한 이상적 시민인 셈이다. _14쪽 〈머리말: 그들은 왜 국경을 넘었을까?〉 중
마지막으로 청년 이민이 인구 정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건강한 청년을 잃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호주는 현지에 부족한 직업군을 수시로 개정해가며 이민을 통해 필요한 기술과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국력을 성장시켜왔다. 고급 기술이나 노동력을 가진 청년층을 이민자로 받아들이려는 선진국 간의 경쟁은 이미 시작됐는데, 한국은 단일민족이라는 정치 서사에 매여 정부 차원의 전략적인 이민 정책 수립이 지연되고 있다. 더군다나 1990년대부터 제3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자 수가 2025년 3월 기준 34, 352명이다. 그러나 탈북민조차도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분단 국가라는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청년이 계속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인력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국가적 차원의 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청년 이민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략적 이민 및 인구 정책을 세우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_20~21쪽 〈머리말: 그들은 왜 국경을 넘었을까?〉 중
1876년, 17세의 조선 청년이 어떻게 중국 상해에서 호주행 선박을 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존 코리아는 호주에 도착한 후 18년 만인 1894년에 시민권을 취득했다. 당시 호주는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시민이 됐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귀화하면서 지은 이름이 존 코리아이며, 귀화신청서 같은 서류는 호주 정부 공식 문서에 남아 있지 않아 본명은 알 길이 없다. / 1894년에 발급된 귀화증명서에 의하면 그는 1859년생이며(사망신고서에는 1857년생으로 기록), 시드니에서 천 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뉴사우스웨일스주 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 골골에서 양털깎이로 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귀화한 해 그의 나이는 35세였고 ‘조선 출신native of Corea’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894년 당시 조선의 영문명은 ‘Corea, Coree, Cauli’ 등 다양하게 표기됐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Korea’로 굳어졌다. 귀화증명서에 명시된 ‘Corea’가 조선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이탈리아의 지명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조선임을 가정하고 추적을 이어갔다. _37~38쪽 〈1장 호주 최초의 이민자, 존 코리아〉 중
150여 년 전, 호주에 첫발을 디딘 존 코리아처럼 당시 한인 노동 이민자는 양반처럼 재력과 지식을 갖춘 상류층이 아닌, 중인 혹은 노비 출신으로 하류층에 속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 해외 이주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식량안보는 이 시기 청년 이주에 매우 원초적이면서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조선 후기에 수많은 한인 청년은 청나라로, 일본으로, 그리고 이보다 더 나아가 시베리아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들 대부분은 하류층으로 상류층 지식인들만 남아 있는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존 코리아의 사례처럼 한반도 밖에 남아 있다. 그런 면에서 국가 간 합의를 통해 하와이나 남미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해 역사에 기록된 한인 노동 이민자 이외에도, 존 코리아와 같은 개별 한인 청년의 노동 이민 사례는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지 수없이 많이 존재했으리라고 본다. / 겨우 17세였던 존 코리아는 상해에서 호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으며 큰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입국 3년 만에 광산권을 신청한 것을 보면, 그의 치열했던 삶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어린 조선 청년은 호주에서 단기 노동 이민자 신분으로 20대와 30대를 보내며 장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광산권을 취득하기까지 돈이 되는 일은 다 했을 것이다. / 그가 광산권을 획득하기까지 28년이나 걸린 이유는 아시아 소수인종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지만 그의 귀화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출신국을 영어 이름의 성으로(코리아) 사용할 정도로 한인 정체성이 강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인 지금 우리 연구팀은 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_50~51쪽 〈1장 호주 최초의 이민자, 존 코리아〉 중
1921년 9월 6일, 김호열은 일본 여권을 가지고4 세인트 알반S. S. St Albans이란 이름의 선박에 올라 호주로 향한다. 당시 헤럴드지는 “한인 교사 김호열이 장로교의 초청으로 멜버른대학교에 수학하기 위해 오다. 8월에 도착 예정”이라는 기사를 냈다. 김호열은 그로부터 약 2주 후인 1921년 9월 19일에 멜버른에 도착했고 스카치컬리지 근처인 코담길 99번지에 거주했다. _57쪽 〈2장 호주 최초 유학생, 김호열〉 중
김호열은 빅토리아 장로교 신자로 교회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런 종교적 신념을 극도로 꺼려 했다. 선교사들이 서구 반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호주 선교사들은 학생 보호 차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김호열이 독립운동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또는 독립에 대한 신념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호주 입국 서류에 본인의 국적과 인종을 조선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_60쪽 〈2장 호주 최초 유학생, 김호열〉 중
역사 연구에는 ‘초국적 역사transnational history’ 혹은 ‘초국사’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국가가 임의로 지정한 국경을 넘나드는 생각, 사물, 인간 및 관습에 관한 연구로, 국경 간 이동과 이주가 주요 연구 대상이다. 개인의 국적은 출생지, 언어, 거주지, 시민권, 인종 및 국가에 대한 맹세 등과 같은 복잡한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복잡한 요소를 초월한 이주민의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는 국가 정체성 그 자체를 위협한다. / 사실 개인의 이동은 국가가 자국민의 거주와 이동을 통제하기 훨씬 전인 수렵과 채집을 하던 원시시대부터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국경 간 이주 과정에서 분류돼야 하는 인종이나 국적은 행정관료적 입장에서 혼란스럽고 ‘지저분한messiness’ 상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호열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와 백호주의를 펼치던 호주에서 한인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당시 호주 이민 당국에 인종, 국적과 관련한 혼돈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그를 가르쳤던 교육 기관조차도 그에 대한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정리나 분류가 되지 않는 ‘지저분한’ 존재였다. / 김호열에 관한 탐구는 국사가 아닌 초국사 연구다. 일제강점기하의 한반도와 백호주의 정책을 펼친 호주라는 국경을 초월하고, 1961년 호주와 대한민국의 공식적 외교 관계가 수립되기 40년 전에 유학을 간 최초의 한인 유학생이라는 점에서 초국사의 일환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국경을 넘은 식민지 문화와 지식 전달, 사적 영역에서의 이민과 교육이 이뤄지는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제한된 이민 정책, 인종차별,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서 일어난 개별 이민자의 생존 방법,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한 교회의 영향은 한인 청년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근대 이민사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제한된 자원과 환경에서 한인 청년 개개인이 더 나은 집단안보를 위해 해외 이주를 추구했으며, 이를 통해 한인 집단의 정체성 유지와 진화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_193~194쪽 〈2장 호주 최초 유학생, 김호열〉 중
김호열의 유학은 본인의 안녕과 교육자로서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피해 호주에 왔지만, 백호주의의 영향으로 입국부터 다양한 제제를 받았고 예외 대상이 됐다. 그는 지금의 북한 서호 지역에서 출생했고 장로교 신자였다. 조선기독대학교를 다닌 것을 보면 중상류층 계급에 속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호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교회를 통한 인적 관계 덕분이었다. 경남 마산 지역에서 호주 선교사들을 알게 됐고 빅토리아 장로교가 그를 후원했기 때문에 영어를 거의 못하는 김호열이 멜버른대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장로교라는 교육 이민의 중재자mediator 혹은 촉매자facilitator가 없었더라면 김호열의 호주 유학은 없었을 것이다. / 김호열과 교회 사이에는 공유되는 가치가 있었다. 김호열에게는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성장, 교회로서는 그를 통한 기독교 전도와 부흥이었다. ‘어두운’ 조선을 기독 교육을 통해 ‘빛’내고자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이는 장로교 해외 선교의 가치와 맞물렸다. 이런 공동의 가치가 있었기에, 가장 적합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김호열이 초국적 이동의 주체 또는 객체가 될 수 있었다. 보호해주는 국가가 없어도,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여권을 들고라도 자신과 중재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국경과 바다를 건너 호주까지의 이동과 거주를 감수한 것이다. _76~77쪽 〈2장 호주 최초 한인 유학생, 김호열〉 중
이민의 진화는 국적과 인종 초월에서 시작된다. 앞서 살펴본 인간안보의 개념과 이번 장에서 소개한 김호열의 사례를 보면 청년은 초국적 이동, 즉 이주와 이민이라는 도구를 통해 좀 더 나은 인간안보를 추구하며 진화해간다. 김호열은 호주 유학을 통해 일제의 지배하에서도 한인 집단의 정체성과 안전을 추구하려 했다. 비록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상은 살아남았다. 김호열이 무사히 호주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뛰어난 지도자로 성장했다면, 한인 집단의 성장과 안보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와 그의 학교, 그리고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성장하고 진화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한인 청년이 김호열처럼 집단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이민의 종합계산법으로 유학이라는 경로를 선택했다. 이주를 감행한 이들의 성공적인 유학과 귀국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청년 이민은 사회와 국가가 진화하는 도구이자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_80~81쪽 〈2장 호주 최초 한인 유학생, 김호열〉 중
전쟁이 끝나고 경기상업고등학교로 복학한 최영길은 호주군에게 소정의 장학금을 받아 1957년 연세대학교 고등상과에 진학했다. 그는 전쟁 내내 카트콤으로 호주군 생활을 했으나, 정식 복무로는 인정되지 않아 군복무를 다시 했다. 카트콤이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은 1953년 7월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였다. 최영길은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철강협회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중 호주 대사관을 찾아가 호주군 3대대 전우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5년 후인 1968년 6월 20일, 한국 및 동남아 참전군인협회Korea & South Asia Forces Association of Australia, 정확히 말하면 한국 전쟁 참전 호주군 3대대(가평대대)의 초청으로 부인 양희진과 당시 15개월이던 장녀 순은을 데리고 호주로 영구 이민을 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_276~277쪽 〈3장 한국 전쟁을 피해 연합군의 나라로〉 중
2장에서 소개한 김호열이 빅토리아 장로교와의 인연으로 멜버른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듯이, 최영길은 호주군 3대대와의 인연으로 호주에 온 지 18년 만에 시드니에 영구 이민을 했다. 이렇듯 청년 이민에서 중재자나 촉매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거주국의 영향력 있는 기관이나 인사의 초청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인 이민자가 정착하기까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와 호주 참전 군인회Korean Veterans Association of Australia는 큰 역할을 했다. 한인 기술 이민자를 초청하고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움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육, 운송 분야에 이들을 적극 소개함으로써 양국 교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1년, 호주와 대한민국이 국가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훨씬 이전부터, 재호한인은 두 나라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양국이 우호적 관계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김호열과 최영길의 이민 촉매자는 각각 교회와 군대로 서로 달랐으나, 두 집단 모두 호주 사회와 경제에 있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_92쪽 〈3장 한국 전쟁을 피해 연합군의 나라로〉 중
조영옥은 호주 군인을 남편으로 맞이했고 그를 따라 호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호주 군인은 전쟁 직후 본국으로 돌아가 조영옥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2~3년이 지나서야 조영옥은 배우자 비자를 받아 남편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남편이 거주하던 지역은 도심에서 서너 시간을 운전해가야 하는 내륙의 작은 마을로, 당시에는 아시아인이 한 명도 거주하지 않았다. / 조영옥은 남편에게 의지해 마을에 정착했다. 그와 남편 사이에는 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두 명은 어릴 때 사망했다. 조영옥은 마가렛Margaret, Maggie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다. 농장일과 집안일, 네 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그는 지옥 같았던 한국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결심 때문인지 모르지만, 조영옥은 1990년대 이후로 확대된 서호주 한인 사회에서도 전혀 활동하지 않았다. 실제로 서호주한인회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재호한인들과 어울리면 아마 과거 기지촌과 한국에서의 생활이 떠오를까 봐 두려워서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_96쪽 〈3장 한국 전쟁을 피해 연합군의 나라로〉 중
전쟁은 어떤 이에게 기회
호주 이민의 첫 번째 문을 연 선구자들
최초의 재호한인 존 코리아와
최초의 호주 한인 유학생 김호열
호주 내 한인 사회 역사는 생각보다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호주국립대학교에서 재호한인을 연구 중인 송지영 교수팀이 발견한 ‘존 코리아’가 있었다. 1876년, 조선 말기는 특히 하층민에게 더욱 힘든 시기였다. 굶주림과 가난, 턱 밑까지 찾아오는 죽음에 늘 시달렸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절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존 코리아는 당시 호주의 골드러시를 노리고 뉴사우스웨일스주로 향했다. 하지만 소수민족이자 고작 17세에 불과했던 그가 이미 금광을 차지하고 있던 백인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호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양털을 깎거나 선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03년에 광산권을 취득한 이후 존 코리아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가 61세가 된 해인 1920년에 결핵으로 애들레이드병원에 입원한 기록을 찾았다. 아마 광부로 오래 일하면서 병을 얻었을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입원 전후로 구세군이 운영하던 노동자 대상의 매우 저렴한 숙소에 머물렀다. 당시 병원 기록에는 존 코리아의 출생지가 ‘일본Japan’으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은 1910년에 주권을 잃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존 코리아가 이탈리아인이 아닌 조선인임을 확신했다. (48쪽)
물론 존 코리아가 호주에 귀화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렸다는 행적을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저자와 그 연구팀이 그의 행적과 고문서를 뒤져 찾아낸 귀화증명서에 기재한 출신국을 비롯해 자신의 이름을 ‘코리아’로 지은 것을 보면, 그 나름대로 호주에 조선을 알리고자 하는 선구자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존 코리아 이후, 호주에 발을 디딘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멜버른대학교로 수학하러 간 최초의 유학생 김호열.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의 후원을 받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여권을 들고 호주에 입국한 김호열은 당시 유색인종을 배척하던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가치관을 세우려 노력했다. 특히 식민 지배라는 현실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그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가 도왔다.
1921년, 한반도는 1919년부터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된 3·1 독립운동을 2년째 이어가고 있었다. 지식인이자 교사 생활을 한 김호열이 당시 본인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입국신고서 국적과 인종 란에 당당히 ‘Corea’와 ‘Corean’이라고 표기했다. (62쪽)
저자는 김호열에 대해 연구를 ‘초국사적 연구’라고 말한다. ‘초국사’란 국가가 임의로 지정한 국경을 넘나드는 생각, 사물, 인간 및 관습에 관한 연구로, 국경 간 이동과 이주 자체만으로도 주요 연구 대상이 된다. 김호열의 사례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문화의 전달뿐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는 이민과 교육이 이뤄지는 과정을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이렇게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타국으로의 이주를 선택한 것은 한인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진화를 만들어낸 케이스로 볼 수 있다.
존 코리아와 김호열이 호주로 향한 이유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을 통해 본격적인 국가간 수교가 이뤄지기 전부터 한국과 호주를 연결하는 깊은 뿌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최초’라는 호칭이 붙은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세계화가 불러온 흐름
청년이 향하는 곳을 알면
사회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이후 호주 내 백호주의가 공식적으로 철폐되면서 많은 이가 새로운 미래라는 희망을 안고 호주로 향했다. 당시 호주 이민성 장관이었던 알 그라스비는 아시아 국가를 순방하며 이민을 장려했는데, 한국은 호주가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호주 입국을 금지했다.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원하던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떠났다. 그중 호주에 불법체류 중인 사람도 많았는데, 곧 불법체류자에 대한 사면이 이뤄지면서 호주로 이민 가는 한국인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특히 영주권을 얻으면서 가족을 불러들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사슬 이민’ 형태로 호주 내 한인사회는 몸집을 불려나갔다.
세계화는 점점 막을 수 없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도 1990년대에 세계여행 자유화를 실시하면서 엘리트층의 조기 유학이 눈에 띄게 늘었다. 비단 호주뿐만 아니라 동일한 아시아 국가로 유학을 간 한인 청년들은 가난이나 굶주림 등의 이유가 아닌 더욱 다양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2차 이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해외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같은 1980년대생으로 조기 유학을 경험한 혜린과 로제는 상반되는 결정을 했다. 혜린은 호주의 직장 문화가 마음에 들어 그곳에 정착했는데 반대로 로제는 소수민족 여성의 한계를 느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저자는 둘의 케이스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는 없으며 그저 본인이 겪고 느끼는 환경에 대한 판단이 이민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호주와 체결한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 다수의 한국 청년이 지금까지도 호주로 향하고 있다. 저자가 현장 조사를 하며 만나 인터뷰한 이들 중, 워홀 제도를 이용해 호주의 시골 마을인 밀두라에 있는 오렌지 농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남준은 영주권을 취득한 후 부동산을 사들여 호주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케이스다. 반면 아버지의 기술 이민 비자로 고등학생 때부터 호주 생활을 시작해 10년째 호주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한 민지 같은 케이스도 있다.
20~40대는 가장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나이다. 학력과 경력, 외국어 실력 향상을 위한 자기계발에 투자함과 동시에 최저임금과 연봉, 근로 시간과 여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령대이기도하다. 150년 전, 존 코리아가 일자리를 찾아 호주까지 왔던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한인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향한다. 양털을 깎으며 광부로 일했던 존 코리아와 달리, 현재 한인 청년의 직업군은 단순 노동인 농장부터 카페, 청소, 대학 교수까지 다양해졌다. (168쪽)
존 코리아와 남준, 그리고 민지 사이에는 150년이라는 세월이 있다. 그사이 이민을 가는 방법도 달라졌고 이유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세계화 이전에는 가난을 피하고 생계를 위한 생존 이주였다면 지금은 건강, 환경, 복지 등 ‘사람답게’, ‘나답게’,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 있는 요인을 중점에 둔 웰빙 이민으로 형태가 변했다. 20~40대 청년층은 경제력과 노동력이 가장 뛰어난 시기다. 이 시기의 청년 이주는 사회의 발전을 예측하는 잣대가 된다. 청년이 유입되는 나라는 그만큼 다양한 노동력과 기술력을 제공받아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발전해간다. 반대로 청년들이 떠나는 나라는 발전 동력을 잃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는 단순한 사회적 환경만을 이유로 이주와 이민을 결심하지 않는다. 저자는 호주 이민을 연대기순으로 정리하고 연구하면서 앞으로 더 발전하는 사회를 만들고, 어느 사회가 앞서갈지 알고 싶다면 청년들이 처한 환경과 문화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인물정보
호주국립대학교에서 재호한인을 연구 중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후 홍콩대학교 법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귀국 후 국가 인원위원회 인권정책국에서 근무하다가 국회위원 비서관으로 일했다. 비서관 일을 하면서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스위스 제네바 유엔인권고등관무실의 컨설턴트를 거쳐 싱가포르국립대학교 정치학과와 싱가포르경영대학 정치학과 조교수를 지냈다. 그리고 호주로 건너가 호주 로위연구소 이민정책실장, 멜버른대학교에서 부교수를 역임했다.
저자는 이민의 진화를 알아가는 과정이 곧 국가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예측할 수 있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말한다. 또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문제에서 벗어나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다양해진 지금, 노동력과 생산력을 지닌 청년들의 이동은 더욱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이민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민의 진화》는 현장 연구와 최신 연구 자료를 토대로 한인 청년이 단순히 고국을 떠난 이야기가 아닌 그들이 향하는 곳과 그 이유를 분석해 앞으로의 국가 발전과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시야와 문제의식, 그리고 이민의 흐름을 한눈에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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