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김혜리 지음

마카롱 2025년 10월 13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제12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우수작. 자유로운 싱글로 살던 도현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전처의 사망으로 초등 학교 입학을 앞둔 딸 채아를 키우게 된다. 그러나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고, 온통 엄마들뿐인 학부모 세계에서 적응하기도 힘들다. 결국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며 도현은 육아휴직을 선택하게 되지만, 주 양육자로서 딸 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기가 알지 못했던 사회와 인간관계의 다른 면을 깨달으며 도현은 조금씩 성장한다.

책 속으로

찬물로 세수하고 나와서 방문을 조심스레 여는 그의 시야에 작은 사람의 몸뚱이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도현의 머릿속에 지난 며칠간의 기억이 스틸컷처럼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장례식장에 갔었지. 가서 큰형님을 만나고…작은형님은 비행기 표를 못 구해서 좀 늦게 한국에 온다고 했고, 장례를 치르고, 이런저런 서류에 사인하고…. 그래, 해수가…죽었지. 그리고 애를 데려왔지. 마지막 말은 거의 소리 내서 말할 뻔했지만 도현은 간신히 삼켰다.
.
.
.
반바지에 슬리퍼, 푹 눌러쓴 모자에 안 깎은 수염. 백수 같은 모습으로 채아를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온 도현의 눈에 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빨랫감과 빈 곳을 놓치지 않고 자리 잡은 잡동사니들, 채아가 급하게 먹다가 식탁 아래로 흘린 음식 부스러기들, 제멋대로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들….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그만둔 지 이제 며칠이 채 안 되었는데, 아침마다 이런 꼴을 볼 때면 상우의 철없는 멘트가 떠오르곤 했다. 육아휴직을 결정하고 나서 같이 맥주 한잔하던 저녁이었다.
“형, 진짜 쉬게?”
상우의 놀란 목소리가 커졌다. 도현은 목소리를 좀 낮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쉬다니, 애 키우러 들어가는 거지. 휴직이라고 그게 쉬는 건 줄 알아?”
“애는 아침에 학교 보내잖아. 빨래야 세탁기가 할 거고, 설거지는 식세기가 할 거고, 그럼 집에서 쉬는 거지. 그래도 회사에서 돈 좀 나오지 않나? 와, 애 키우면 이런 게 좋구나.”
이건 도대체…장난이야 진심이야? 원래 서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이기는 했지만, 그때만큼은 정말이지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이 자식은 대체 그동안 뭘 본 거야? 혼자 애 키우느라 그 난리인 걸 옆에서 봤을 텐데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참자, 이놈이 몰라서 그래, 몰라서. 아니면 그냥 장난일 거야. 도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꾸했다.
“그래, 쉬면서 돈 받으니까 좋다 임마.”

출판사 서평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은 부녀 관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 서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일상의 작은 장면들이 쌓이며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상실과 회복이라는 주제를 감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따뜻함과 분석적 시선이 균형을 이루며 동시대 가족 서사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는 소설.

인물정보

저자(글) 김혜리

2021년《월간문학》수필부문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습니다. 에세이도 쓰고 소설도 쓰며 기억하고 싶은 것들,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들을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