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2024년 09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0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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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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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서론
1. 무대: 막북 초원과 초원 속의 도시 네트워크
2. 자료: 한문 자료와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의 연결
3. 검토: 위구르 유목제국의 성격 논쟁
4. 내용: 막북 초원에 고립된 위구르의 발전 모색
제1편 건국과 성장: 정통성의 확립과 막북 초원의 통합(744~755)
제1장 국가 건설
1. 야글라카르 ‘퇴뤼(고제)’의 회복과 ‘일(국가)’의 건설 구상
2. 군사 원정과 ‘보둔(백성)’의 확보
제2장 체제 정비
1. 보둔의 조직: 토쿠즈 오구즈와 온 위구르의 재편
2.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 친병 집단의 확보와 분봉
제3장 근거지와 위상 확보 노력
1. 카를륵 카간의 계절 이동과 근거지 ‘외튀켄’의 확보
2. 막북 초원의 지배 범위
3. 당과의 교섭과 위구르의 위상
제2편 집권과 고립: 당과의 관계 강화와 집권 노력의 한계(755~787)
제1장 군사 개입과 위상 변화
1. 안녹산 진압을 위한 군사 원조(756)와 당과의 혼인 관계 성립
2. 뵈귀 카간의 친정(762)과 동아시아 세계의 재편
제2장 집권 노력과 내적 갈등
1. 도시 건설의 확대와 마니교 수용
2. 소그드 상인 문제와 톤 바가 타르칸의 정변(780)
제3장 780년대 당과의 갈등과 고립
1. 당의 위구르 사신 토둔 살해(782)와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의 소그드 상인 탄압
2. 당과 토번의 청수지맹(783)과 위구르의 외교적 고립
제3편 확장과 발전: 막북 고립 탈피와 체제의 고도화(787~839)
제1장 북정 진출과 지배 집단의 교체
1. 고립 타개 노력과 북정 진출 시도(787)
2. 북정 재진출(789~791)과 지배 집단 야글라카르의 내분
3. 쿠틀룩의 북정 점령과 집권(791), 그리고 에디즈로의 지배 집단 교체(795)
제2장 오아시스 경영과 대외 발전
1. 오아시스 경영, 그리고 당과의 견마무역 확대
2. 820년대 당과의 화의와 서방 경략
3. 대외 확장 노력과 마니교의 발전
제4편 이산과 기억: 빅뱅과 위구르 후예의 과거 기억(839~848)
제1장 붕괴(840)와 이산
1. 붕괴: 지배 집단의 갈등과 자연재해, 그리고 키르기스의 공격
2. 이산과 주변 세계의 재편
제2장 14세기 위구르 후예가 기억하는 몽골 초원과 조상
1. 영광스러운 유목제국에 대한 기억
2. 두 강과 성산에 대한 기억
3. 뵈귀 카간 전설과 위구르의 유산
맺음말: 위구르의 막북 초원 고립 극복 노력과 그 유산
부록
1. 고대 투르크 비문 연구
2. 고대 투르크 비문 번역: 《테스 비문》, 《타리아트 비문》, 《시네 우수 비문》
3. 카간의 계보와 호칭
찾아보기
초원에 구축된 ‘도시 네트워크’
위구르는 서방과 이어지는 교역망을 만들기 이전인 건국 초기부터 막북 초원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교역 거점인 이른바 ‘카라반사라이caravansarai’, 즉 ‘도시’를 건설했다. 이는 교역을 위해 활동하던 소그디아나Sogdiana 출신의 카라반, 즉 대상隊商인 국제 상인만이 아니라 당과의 혼인을 통해 공주와 함께 유입된 중국인 등 다양한 비유목민을 위한 시설이었다. 이러한 시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던 유목 군주의 영지營地 및 그 밖의 여러 곳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초원의 교역로를 따라 건설된,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도시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계절 이동하는 유목민과 다양한 외래 주민이 함께 어울리는 ‘공존’의 공간이 되었다. 위구르는 막북 초원과 이를 가로질러 이어진 ‘도시 네트워크’를 무대로 발전했고, 840년 붕괴 이후에는 초원을 떠나 주변 세계로 폭발적으로 확산하면서 그 활동 무대를 더욱 확장했다. - 20~21쪽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중국의 위구르 역사 연구
중국 내 연구는 민족 융합融合의 과정을 거쳐 위구르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편입된 과정, 위구르의 문화적 발전이 중국 문화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개별 소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향이었다가, 이후에는 ‘여러 중심에 기초한 하나의 중국을 형성하려는 입장(다원일체격국多元一體格局)’에 따라 새로운 정리가 이루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의 내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개별 소수민족의 ‘민족사民族史’가 아닌 ‘변강사邊疆史’로서의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화민족공동체’의 형성을 강조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그 범위 안에서만 위구르를 다루게 됨에 따라 민족사 연구는 더욱 위축되었다. - 28~29쪽
비문 자료에 남아 있는 위구르의 통치 이념 ‘퇴뤼’
‘일(국가)’의 건설 과정은 비문 자료에 남아 있는 국가 건설 구상의 준거였던 ‘퇴뤼(고제古制)’에 대한 카를륵 카간의 인식을 분석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국가 건설 구상과 정통성 확립의 근거인 퇴뤼의 회복 과정을 이해하면, 그가 원정을 통해 ‘보둔(백성)’과 자신의 ‘영역’을 어떻게 조직했는가도 알 수 있다.
카를륵 카간이 회복하려고 했던 퇴뤼는 나라를 건국하고 통치할 수 있는 근거였다. 좁은 의미로는 ‘조법祖法(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불문법)’이고, 넓은 의미로는 ‘텡그리teŋri(하늘[天] 또는 신神)와 아타ata(조상祖上) 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전통傳統’이다. 중국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때 반드시 존중하고 준수해야 할 ‘상제上帝’,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비슷한 개념이다. 카를륵 카간은 유목 세계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 신생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를 통치의 근거로 삼았다. - 45~46쪽
8세기 중반 위구르의 성장과 동아시아 세계의 재편
안녹산의 봉기 이후 10여 년에 걸친 당의 내전 과정에서 막남 초원에 대한 기미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뿐만 아니라 복고회은을 대표로 하는 막남 초원의 투르크 유목 세력 역시 약해졌다. 기미 지배를 받던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이 7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었고, 7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돌궐 붕괴 이후 남하한 막남의 돌궐 항호 또한 부흥 운동으로 당에 도전하다가 소멸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유목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장악하고, 당과의 경제적 관계를 독점했다. 뵈귀 카간은 당 황제와 형제 관계를 맺고 경제적 교섭에서 자신을 단일 창구로 삼도록 했다. 그 결과 전리품만이 아니라 막대한 세폐를 얻는 등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경쟁 관계였던 카를룩, 키르기스, 거란 등의 인정도 받아냈다. 이렇게 위구르는 안녹산의 봉기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세력 재편의 최대 수혜자로 200여 년간 초원을 지배했던 돌궐의 권위를 완전히 대체했다. 당을 대신해 막남 초원까지 지배할 만큼 성장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북을 중심으로 한 유목 세계를 대표하는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 172~173쪽
대외 무역과 국가 경영에 참여한 소그드 상인
위구르에서도 소그드 상인들의 활동이 확인된다. 카틀륵 카간은 초기부터 정주민을 위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영국공주를 따라온 소그드 상인과 중국인을 위해 셀렝게강 부근에 바이 발릭을 만들었다. …… 소그드 상인의 역할은 769년 영휘공주가 위구르에 온 이후 견마무역을 한 것과 관계가 있다. 위구르가 당에 사신을 보낼 때 “구성호九姓胡(소그드 상인)와 동행한다”라고 했던 것은 소그드 상인이 위구르와 당 사이의 무역에 종사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 장안에는 위구르의 지원을 받는 소그드 상인이 1000여 명 정도 있었으며 이들이 엄청나게 축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 소그드 상인은 대외 무역뿐만 아니라 국가 경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뵈귀 카간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소그드 상인의 욕구를 해결해주어야 했다. 카간과 카간을 뒷받침하는 중상주의적 입장의 상인 출신 관료의 결합은 ‘권위주의적 상인 관료 체제’를 낳았다. 이와 같이 ‘위구르 일’은 유목에 기초한 초원 경제와 ‘정주적’ 성격을 띤 외래 요소가 공존하는 ‘이종 결합異種結合적’ 국가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흐름에서 초원에는 정주 지역 출신 주민의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181~183쪽
위구르의 마니교 수용
마니교도는 762년 낙양까지 온 위구르의 군주를 상대로 국가 운영과 당과의 교섭에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했다. 뵈귀 카간은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나 당처럼 마니교도에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운영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 교역을 발전시키려 했던 위구르의 입장에서 오아시스 출신의 유능한 상인과 결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침 이 무렵 마니교 교의로 무장한 소그드 상인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칠부(산술算術)에 정통했다”라는 비문 기록은 마니교도가 상업적 능력도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국가 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자문을 했다. 고대에 승려 집단이 최고의 지성을 갖춘 엘리트 집단으로서 국가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209~210쪽
위구르의 서방 진출을 보여주는 《구성회골가한비문》
위구르는 820년대 후반 서방에 진출한 이래로 최대 영역을 확보했다. 이 무렵 위구르는 이와 같은 발전을 자랑하기 위해 《구성회골가한비문》을 제작했다. 이 비문은 크기가 약 3.38미터로 추정되는데, 네 면을 고대 투르크 문자와 소그드 문자, 한자 등 세 가지 문자로 기록했다. 각기 다른 세 문자가 하나의 비문에 따로 새겨진 것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문화 교류와 위구르 사회의 발전 정도를 보여준다. …… 마니교의 전파와 회신 카간의 795년 카간 계승, 800년대 서방 진출 관련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카간의 공식 명칭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 현존하는 《구성회골가한비문》은 기공비로서의 성격과 함께 마니교의 발전을 칭송하는 측면을 모두 담고 있다. 유목국가에 수용된 고등 종교는 ‘통합의 이념’이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것을 기초로 ‘성전聖戰’을 전개할 수 있는 종교적 명분까지 제공할 수 있었다. - 273~283쪽
위구르의 붕괴와 이주 원인으로서 ‘전염병(탄저병)’의 유행 가능성 탐색
탄저균은 토양과 접할 기회가 많은 초식동물이 쉽게 감염될 수 있다. 유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양이 탄저균에 대한 저항성이 가장 약하기 때문에 유목민에게 특히나 치명적이다. 양이 소나 말 등에 비해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은 이유는 식물의 뿌리까지 먹는 습성으로 인해 토양과 접촉하는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양의 이런 습성은 유목민이 초지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더욱이 이미 기근으로 영양 상태가 나빠진 터라 탄저병은 더 쉽게 확산되었고, 결국 가축의 대량 폐사로 이어졌다. 가축에 의존하는 유목 경제의 재생산 구조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 전염병의 여파는 제국의 와해와 위구르인들의 이주에서 끝나지 않았다. 위구르를 무너뜨린 키르기스도 이곳에서 세력화를 시도하다가 머지않아 자신들의 고지인 예니세이강 유역으로 복귀했다. 그 결과 이곳 초원은 동부에 있던 몽골계 집단이 이주해 올 때까지 상당 기간 공동화空洞化된 채로 남겨졌다. 유목민들이 초원을 포기한 이유가 전적으로 재해와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겠으나, 이런 측면도 비중 있게 고려해야 함은 분명하다. - 300~302쪽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위구르의 탄력성
고창 위구르의 다양성 수용과 문화 변용 능력에 주목한다면, 유목제국 시기에 도시 네트워크와 고등 종교 같은 외래 요소가 깊숙이 침투했기 때문에 오아시스로 이주한 이후 완전히 정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과론적 설명은 반성을 요한다. 이런 이해는 유목민은 초원에만 살아야 하고, 초원을 떠나면 정주할 수밖에 없다는 선입견에 따른 것이다. 또한 초원에서든 오아시스에서든 도시 네트워크나 고등 종교 같은 정주적 성격의 외래 요소는 위구르의 국가 운영과 권력 유지 수단으로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결과였다. 몽골 초원의 위구르뿐만 아니라 그 후예인 고창 위구르 역시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변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 357~358쪽
출간 의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유목제국 1000년 역사를 복원하다
흉노, 돌궐, 위구르로 이어지는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 완성
국내의 대표적 중앙아시아사 연구자인 정재훈 교수와 1998년 이래로 중앙아시아사 분야 학술서와 교양서를 꾸준히 출간하고 있는 사계절출판사가 함께한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이 마침내 완간되었다. 정재훈 교수는 2016년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2023년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했고, 지난 2005년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했던 『위구르 유목제국사』를 새로운 형식과 체제에 맞게 다시 써서 8년여에 걸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신간 『위구르 유목제국사』는 전 세계 중앙아시아사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전면 검토 및 반영하고, 지도와 도판, 고대 투르크 비문의 원문과 번역문, 국가 구조 및 카간의 계보를 담은 도표 등을 대거 보강하여 현시점에서 가장 충실하고 균형 잡힌 위구르 유목제국 통사로 완성되었다.
정재훈 교수의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은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약 1000년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제국을 형성했던 흉노, 돌궐, 위구르가 중심이지만, 그 밖에도 북아시아 초원에 등장했던 수없이 많은 유목 세력의 길거나 짧았던 역사를 전반적으로 아우른다. 정 교수는 이 3부작을 통해 유목제국의 세계사적 위상과 의미를 환기하고, 유목민이 활약했던 무대인 ‘초원’을 정주 세계와 동등한 하나의 역사 단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독자들은 이 3부작을 통해 중국사 중심의 동아시아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유목민이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야만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서를 연결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동적인 주체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위구르는 교역 국가를 지향한 유목제국이었다”
문명사관과 중국 중심 역사관에서 벗어나 위구르의 세계사적 위상 재정립
5세기 중반 고차의 일원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위구르는 당의 기미 지배를 받으며 군사적 봉사를 하거나, 돌궐에 귀순했다 벗어나기를 반복하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744년 건국을 선언했다. 건국 이후 카를룩, 바스밀 등 주변 세력을 차례로 복속하는 한편, 기마궁사로서 ‘군사적 특기’를 발휘해 당의 변경 방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에서 온 화번공주와 카간이 혼인하면서 초원에 정주 시설을 마련하고 다수의 정주민을 받아들였으며, 당과의 견마무역에서 얻은 비단을 소그드 상인을 통해 서방으로 유통시키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787년 당과 토번의 대립으로 하서 교통로가 막히자, 당에서 막북 초원을 거쳐 북정(베쉬 발릭)에 이르는 ‘회골로回鶻路’를 연결하고 이를 발판 삼아 790년대 초에는 서방 오아시스 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해 동서 교역의 주역이 되었다.
위구르는 초기부터 초원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교역 거점인 이른바 ‘카라반사라이’, 즉 도시를 건설했는데, 교역로를 따라 이 도시들이 연결되면서 초원에 ‘도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도시들은 계절 이동을 하는 유목민과 교역을 위해 드나드는 상인, 중국을 비롯한 정주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를 운영하며 교역 국가를 지향하던 위구르는 9세기에 이르러 거대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계승 분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840년 갑작스럽게 붕괴하고 말았지만, 각지로 흩어진 그 후예들은 ‘위구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후 세계사의 전개에 큰 영향과 유산을 남겼다.
이와 같이 위구르는 동서를 연결하는 거대한 제국을 운영했지만, 그동안 그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초원에 들어선 정주민을 위한 거주 시설, 상업과 행정에 능한 소그드인과의 결합, 고등 종교인 마니교 수용, 문자 사용, 당과의 적극적인 교류 등 위구르가 보인 포용적이고 탄력적인 모습은 일본과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정주화 지향’으로 해석되었다. 즉 유목민은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점차 정주 세계에 ‘동화同化’할 수밖에 없는데, 위구르 역시 ‘정주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며 점차 ‘문명화’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붕괴 이후 이들이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를 야기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0세기 초 민족 이동기에 농경 지역과 초원을 동시에 지배한 이른바 ‘정복 왕조’인 거란의 등장과 연결하여 위구르를 ‘고대 유목국가의 종말’이자 ‘정복 왕조의 배경’인 과도기적 유목국가로 규정하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정재훈 교수는 이와 같은 논리는 모두 ‘열등한’ 유목국가가 ‘우월한’ 정주국가를 향해 발전해간다는 일종의 문명사관일 뿐만 아니라, 유목제국의 운영 방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흉노, 돌궐을 거쳐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 특유의 생존 방식을 연구해온 정 교수는 다양한 외래 요소와의 공존 자체가 유목제국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흉노, 돌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 즉 막북 초원에 고립되어 있던 위구르의 입장에서는 정주적 요소를 적극 수용해 교역 국가로 발전해가는 것이 곧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길이었다.
교역 거점이기도 한 도시의 건설이 제국의 ‘하드웨어’를 확보한 것이었다면, 마니교와 같은 고등 종교의 수용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외래 집단의 문화 전반을 받아들여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소프트웨어’의 완비였다고 할 수 있다. ……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뵈귀 카간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고 마니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목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 요소 중 하나였다. 막북 초원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유목제국을 발전시키려면 외부의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존 연구들에서 지적한 바와 달리, 위구르가 정주적 성격을 보이는 외래 요소를 수용한 것은 붕괴 이후 오아시스 등지로 이주해 정주하기 위한 것, 즉 ‘문명화’의 전제가 아니었다. 교역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체제를 고도화하는데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뿐이다. - 204~212쪽
유목제국 위구르의 역사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 중국 영토의 일부인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이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위구르를 하나의 중국에 통합하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당과 위구르의 우호적 관계만을 강조하거나, 위구르 고유의 ‘민족사’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정재훈 교수는 제삼자의 시각에서 중국 편향적인 시각을 교정하고, 유목민의 입장을 더해 한층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은 문명사관은 물론 ‘중화민족공동체’ 중심 역사관에서도 벗어나, 유목적 관점을 중심으로 위구르의 세계사적 위상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고대 투르크 비문 자료와 한문 자료의 연결
지난 100여 년간의 투르크 비문 및 위구르 역사 연구 집대성
정재훈 교수가 유목민의 관점에 가까운 역사 서술을 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원사료, 그중에서도 위구르가 남긴 고대 투르크 비문을 직접 읽고 해석하여 한문 자료와 연결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역사는 대개 정주 세계가 남긴 방대한 사료를 통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돌궐, 위구르 등은 고대 투르크 문자로 새긴 비문, 즉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위구르는 고대 투르크 문자만이 아니라 상인이나 관료로 활약한 소그드인의 문자와 한자로도 비문을 남겨 그들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다소 편파적인 한문 자료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기록의 공백을 보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책은 위구르의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이 군사 원정의 승리를 기념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세웠던 기공비인 《테스 비문》과 《타리아트 비문》, 그리고 카를륵 카간의 묘비인 《시네 우수 비문》 및 12대 카간인 소례 카간 시기에 고대 투르크 문자, 소그드 문자, 한자로 새긴 《구성회골가한비문》의 기록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등의 사료와 비교해 위구르 유목제국의 ‘진상眞相’에 다가간다. 고대 투르크어 자료와 한문 자료를 모두 검토하여 두 기록 사이의 불일치나 공백을 유목 권력의 특수성, 유목 경제의 운영 방식 등에 비추어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백미다. 유목국가는 군주의 개인적 능력이나 권력 집중도 등이 국가의 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 교수는 특히 ‘카간권’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위구르의 역사 전개를 추적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돌궐의 국가 구조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위구르의 국가 구조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한문 자료를 근거로 통치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을 하거나, 위구르가 중국식 관직명을 도입한 것에 주목해 7세기 후반 당의 지배하에서 그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한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비문 자료를 고려하지 않고 한문 자료에만 기초한 초보적인 검토에 불과했다. 국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비문 자료의 복원을 통해 가능하다. 특히 2대 카간인 카를륵 카간이 남긴 비문에는 건국 이전, 부왕과 함께한 건국 과정, 이후의 체제 정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중에서도 카를륵 카간이 753년에 세운 기공비인 《타리아트 비문》에서 건국의 완성을 천명한 점에 착안해 이 무렵 전후를 ‘건국기’로 설정하고, ‘국가 건설과 성장 과정’을 정리해볼 수 있다. - 44~45쪽
뿐만 아니라 정재훈 교수는 학계에서 논쟁적으로 다루는 여러 주제들, 예를 들어 ‘유목 세계의 중심지인 외튀켄은 어디인가’, ‘한문 자료에 힐간가사頡干迦斯 또는 힐우가사頡于迦斯라고 기록된 인물은 이후 회신 카간으로 집권한 쿠틀룩이 맞는가’, ‘위구르의 마니교 수용 양상은 어떠했는가’, ‘위구르가 붕괴 이후 막북 초원을 떠난 이유와 전염병(탄저병)의 발생’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힌다. 원사료의 충실한 번역, 중국이나 서구 학계에 만연한 편견에서 벗어난 해석, 동물 전염병에 대한 수의학적 지식 원용, 영미권은 물론 유럽,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골의 연구 성과까지 모두 검토한 뒤에 신중하게 정리한 저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위구르 유목제국의 본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에는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의 발견과 조사 이래로 100여 년간 축적된 발굴 성과와 저자의 실제 답사 결과를 종합한 현장 지식도 담겨 있다. 저자는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지만, 20년 이상 몽골 초원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유목’이라는 생산 양식을 낳은 현지의 지형과 기후를 살피고, 정주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유목민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조사해왔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자료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지도와 도표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100여 년간 축적된 문헌 연구와 발굴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붕괴 이후 위구르의 후예가 남긴 신화 분석을 통한
위구르의 역사적 유산과 정체성 확인
앞서 등장했던 흉노, 돌궐과 다르게 위구르는 현재 ‘위구르’라는 이름을 그대로 잇는 이들의 땅이 존재하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역사 인식의 근거로 위구르 유목제국을 소환한다. ‘위구르’라는 정체성이 이렇게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재훈 교수는 위구르의 붕괴 이후 각지로 흩어졌던 세력 가운데 고창 위구르의 후예인 고창왕이 14세기에 몽골 초원에 대한 기억과 유목 세계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담아 제작한 《역도호고창왕세훈비》의 신화 기록에 주목한다. 비문 첫 부분에 기록된 시조 탄생 신화의 한문 채록본과 페르시아어 기록(주베이니의 『세계 정복자의 역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을 비교하여 성스러운 나무와 햇빛, 성스러운 숫자 ‘5’ 등의 신화 모티브를 추출하고, 신화의 지리적 배경으로 제시된 강과 고창 위구르의 지배 집단인 복고의 원주지인 톨강, 그곳에 남아 있는 무덤 유적 등을 연결한다. 이를 통해 위구르의 후예이자 5세기 ‘오부고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고의 후손으로서 투르크 유목민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한 고창왕의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 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했다. …… 위구르 멸망 이후 그 유산을 가지고 각지로 흩어진 투르크 유목민의 역사는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 전반에,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 345~346쪽
위구르의 정체성이 오랜 시간 이어진 또 하나의 이유는 위구르가 자신의 언어를 유지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과거 초원에서 빌려 썼던 고대 투르크 문자 대신 소그드 문자를 변용한 ‘위구르 문자’를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자신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며 오아시스 지역의 토착민을 일부 동화시키기도 했고, 중앙아시아에 투르크어 사용자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구르가 붕괴한 이후 몽골 초원은 더 이상 투르크 유목민의 땅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역사적 유산은 오래도록 이어져 그 이름을 계승하는 후예들을 남긴 것이다. 이 책은 위구르의 붕괴가 이후 동아시아 세계의 세력 재편,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까지를 아우르며 초원 세계를 왜 하나의 역사 단위로 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정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위구르 유목제국사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사, 튀르키예 이스탄불대학교 투르크학연구소와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후PostDoc 연구원,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동아시아태평양학연구소 방문학자 등을 거쳤다. 2002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2005,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2016,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ICAS 최우수학술도서), 『유라시아로의 시간 여행』(공저,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202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동아시아사 입문』(공저, 2020)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김호동·유원수와 함께 번역한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1998)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중국 정사 외국전 역주’ 시리즈 가운데 『사기』·『한서』(2009), 『주서』·『수서』·『북사』(2010),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신오대사』(2011)의 「북적전」 역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사 관련 사료를 골라 번역 소개한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공역, 2014) 등이 있다. 그 밖에 고대 유목제국사와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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