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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법고소리

2024년 02월 1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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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6.91MB)
ISBN 9791196540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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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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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특징:
[벽암록] 번역에 오역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서 조금이나 덜어보고자 시작하였다. 특히 장경각 번역의 [벽암록]과 비교하여 상이한 부분은 주석으로 2000개 이상을 남겨 두었다.
이 책은 벽암록 번역들에 오역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서 조금이나 덜어보고자 시작하였다.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벽암록은 예로부터 불교의 바른 안목을 밝히고 화두참구를 하는 수행자들에게 귀중한 스승이었으며 안내자 역할을 해왔다. 그러기에 선禪의 백미(白眉)라고도 하고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고도 불리웠다. 모두가 옛 사람들의 가르침과 함께 진리의 세계에 더욱더 깊고도 오묘한 세계로 나아가시기를 바란다.

2. 벽암록이란
선(禪)의 세계는 일찍이 말로 설한 적이 없다. 그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옛사람은 말로 하여서 화두를 참구하고 좌선을 하는 수행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절함을 놓지 않았다. 벽암록 100칙 하나하나가 태산과 같고 바다와 같은 심오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캄캄한 밤길을 가는 자에게는 등불이 되고 절벽 끝에 처한 자에게는 살길을 열어주어서 절대적인 지혜의 문에 이르게 하고 있다. 눈이 열리면 열릴수록 그 소중함은 더욱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오늘날 특히 이 한 권의 [벽암록]은 수행자에게 더없이 좋은 벗이고, 스승이고, 안내자이고, 나의 공부를 제대로 점검해줄 수 있는 뼈아픈 방망이라고 하겠다.


벽암록 목차

머리말
상권
제1칙 - 달마의 확연무성(達磨廓然無聖)
제2칙 - 조주의 명백함에도 있지 않음(趙州不在明白)
제3칙 - 마조의 일면불월면불(馬祖日面佛月面佛)
제4칙 - 덕산의 없다! 없다!(德山無無)
제5칙 - 설봉의 온 대지와 좁쌀알(雪峰盡大地栗米粒)
제6칙 - 운문의 날마다 좋은 날(雲門好日)
제7칙 - 법안의 그대는 혜초이다(法眼汝是慧超)
제8칙 - 취암의 눈썹(翠巖眉毛)
제9칙 - 조주의 문(趙州門)
제10칙 - 목주의 할 이후(睖州喝後)
제11칙 - 황벽의 선사가 없다(黃蘗無禪師)
제12칙 - 동산의 마삼근(洞山麻三斤)
제13칙 - 파릉의 제바종(巴陵提巴宗)
제14칙 - 운문의 대일설(雲門對一說)
제15칙 - 운문의 도일설(雲門倒一說)
제16칙 - 경청의 줄탁동시(鏡淸啐啄同時)
제17칙 - 향림의 조사서래의(香林祖師西來意)
제18칙 - 혜충국사의 무봉탑(忠國無縫)
제19칙 - 구지의 한 손가락(俱胝一指)
제20칙 - 용아의 서쪽에서 오신 뜻(龍牙西來意)
제21칙 - 지문의 연꽃과 연잎(智門蓮花荷葉)
제22칙 - 설봉의 자라코 뱀(雪峰鄨鼻蛇)
제23칙 - 보복의 묘봉정상(保福妙峰頂)
제24칙 - 유철마의 늙은 암소(劉鐵磨老牸牛)
제25칙 -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蓮花峰庵柱杖)
제26칙 - 백장의 기특한 일(百丈奇特事)
제27칙 - 운문의 체로금풍(雲門體露金風)
제28칙 - 열반의 사람에게 말하지 않은 법(涅槃不為人說底法)
제29칙 - 대수의 겁화(大隋劫火)
제30칙 - 조주의 진주에서 큰 무우가 나다(趙州鎮州出大蘿蔔頭)

중권
제31칙 - 마곡의 석장을 흔들다(麻谷振錫)
제32칙 - 임제의 불법의 대의(臨濟佛法大意)
제33칙 - 자복의 일원상(資福圓相)
제34칙 - 앙산의 오로봉(仰山五老峰)
제35칙 - 문수의 전삼삼후삼삼(文殊前三三後三三)
제36칙 - 장사의 산을 유람하다(長沙遊山)
제37칙 - 반산의 마음을 구하다(盤山求心)
제38칙 - 풍혈의 무쇠소(風穴鐵牛)
제39칙 - 운문의 금모사자(雲門金毛獅子)
제40칙 - 남전의 뜰에 핀 꽃(南泉庭花)
제41칙 - 조주의 큰 죽음(趙州大死)
제42칙 - 방거사의 좋은 눈(老龐好雪)
제43칙 - 동산의 추위와 더위(洞山寒署)
제44칙 - 화산의 해타고(禾山解打鼓)
제45칙 - 조주의 청주포삼(趙州靑州布衫)
제46칙 - 경청의 빗방울소리(鏡淸雨滴聲)
제47칙 - 운문의 여섯으로 거두지 못함(雲門六不收)
제48칙 - 왕태부의 옷소매를 떨치고(太傳拂袖)
제49칙 - 삼성의 금빛 비늘(三聖金鱗)
제50칙 - 운문의 진진삼매(雲門塵塵三昧)
제51칙 - 암두의 말후구(巖頭末後句)
제52칙 -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제53칙 - 마조의 들오리(馬祖野鴨)
제54칙 - 운문의 전수(雲門展手)
제55칙 - 도오의 말하지 못함(道吾不道)
제56칙 - 흠산의 한 화살촉(欽山一鏃)
제57칙 - 조주의 간택하지 않음(趙州不揀擇)
제58칙 - 조주의 소굴(趙州窠窟)
제59칙 - 조주의 지극한 도(趙州至道)
제60칙 - 운문의 주장자(雲門拄杖)
제61칙 - 풍혈스님의 한 티끌(風穴一塵)
제62칙 - 운문의 하나의 보배(雲門一寶)
제63칙 - 남전의 참묘(南泉斬猫)
제64칙 - 조주의 초혜(趙州草鞋)
제65칙 - 세존의 양구(世尊良久)
제66칙 - 암두의 큰 웃음(巖頭大笑)
제67칙 - 부대사의 금강경(傳大師金剛經)
제68칙 - 앙산과 삼성의 혜적과 혜연(慧寂慧然)
제69칙 - 남전의 일원상(南泉一圓相)
제70칙 - 백장의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百丈併卻咽喉唇吻)
하권
제71칙 - 백장의 이마를 쪼개고(百丈斫額)
제72칙 - 백장의 나의 자손을 잃었다(百丈喪我兒孫)
제73칙 - 마조의 사구백비(馬祖四句百非)
제74칙 - 금우의 춤(金牛作舞)
제75칙 - 오구의 굴방(烏臼屈棒)
제76칙 - 단하의 밥은 먹었는가(丹霞喫飯)
제77칙 - 운문의 호병(雲門餬餅)
제78칙 - 열여섯 보살의 수인(十六開土水因)
제79칙 - 투자의 제일의(投子第一義)
제80칙 - 조주의 갓난아이(趙州初生孩子)
제81칙 - 약산의 화살을 보라(藥山看箭)
제82칙 - 대룡의 견고법신(大龍堅固法身)
제83칙 - 운문의 고불노주(雲門古佛露柱)
제84칙 - 유마의 묵연(維摩默然)
제85칙 - 동봉의 호랑이 소리(桐峰虎聲)
제86칙 - 운문의 주고삼문(雲門廚庫三門)
제87칙 - 운문의 자기(雲門自己)
제88칙 - 현사의 세 가지 병(玄沙三種病)
제89칙 - 대비보살의 천수천안(大悲千手千眼)
제90칙 - 지문의 반야(智門般若)
제91칙 - 염관의 무소부채(鹽官犀扇子)
제92칙 - 세존께서 자리에 오르시다(世尊陞座)
제93칙 - 대광의 춤(大光作舞)
제94칙 - 능엄경의 보지 않음(楞嚴不見)
제95칙 - 보복의 여래의 말씀(保福如來語)
제96칙 - 조주의 삼전어(趙州三轉語)
제97칙 - 금강경의 멸시와 천대(金剛輕賤)
제98칙 - 서원의 두 차례 틀림(西院兩錯)
제99칙 - 혜충국사의 십신조어(慧忠十身調御)
제100칙 - 파릉의 취모검(巴陵吹毛劍)

글을 마치며
역자소개

제1칙
달마의 확연무성(廓然無聖)

【수시】 수시(垂示): 교시(敎示)하다. 수교(垂敎)하다. 대중에게 법을 나타내보이다. 선(禪)에서 스승이 제자와 대중에게 가르침의 요체를 열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수설, 수어라고도 한다.

산을 사이에 두고 연기가 보이면 곧 불이라는 것을 알고, 담을 사이에 두고 뿔이 보이면 곧 소라는 것을 안다. 하나를 들면 셋을 밝혀서 한눈에 저울질하니, 목기수량(目機銖兩): 사람이 총명하고 민첩한 것을 말한다. 즉 한번 보고는 곧 무게의 가볍고 무거운 정도를 가려내는 것을 일컫는다. ‘目機’는 눈으로 무게를 측정해 아는 것을 말하고, ‘銖兩’은 극히 미소한 무게를 일컫는다. (佛光大辭典)
이것은 납승가(衲僧家)에서 일상으로 (마시는) 차이고 (먹는) 밥이다.
모든 흐름(衆流) 중류(衆流): 모든 종류의 부류 곧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등의 모든 부류를 일컫는다.
을 끊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동에서 솟아오르고 서에서 잠기고, 따르고 거스르는 것을 종횡으로 하고, 주고 빼앗는 것을 자재하게 한다. 장경각 번역: 하나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 셋을 알고 상대의 수행이 깊은지 얕은지를 한 눈에 척 아는 것이야 납승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알음알이를 끊어버리고 동쪽에서 솟았다가 서쪽으로 잠기기도 하고, 종횡무진하게 상대의 감정에 맞춰주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하며, 자유자재하게 용서하기도 한고 처단하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은 때라면, 자 말해보라, 이는 어떤 사람의 행리처(行履處) 행리처: 수행자의 일상 즉 행주좌와, 어묵동정,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상을 가리키다.
인가? 설두스님의 갈등(葛藤) 갈등이란 곧 등나무와 칡넝쿨이 서로 뒤엉켜 다투는 것을 말한다.
을 보라.
垂示云, 隔山見煙, 早知是火, 隔牆見角, 便知是牛. 舉一明三, 目機銖兩, 是衲僧家尋常茶飯, 至於截斷眾流, 東湧西沒, 逆順縱橫, 與奪自在. 正當恁麼時, 且道. 是什麼人行履處. 看取雪竇葛藤.

【본칙】
양무제(梁武帝)가 달마(達磨)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조사: 남인도 향지국왕의 셋째아들이며 27조 반야다라 존자(尊者)의 법을 이어 후에 벵골만에서 배를 타고 3년에 걸쳐 마침내 남조 양(梁) 나라 고조(高祖, 대통大通 원년, 527) 중국 광주(廣州)에 이른다. 그리고는 지금의 남경인 금릉에서 양(梁)의 무제(武帝)를 만났는데, 그때 달마 대사의 나이가 130세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북쪽으로는 북위(北魏), 남쪽으로는 양(梁)으로 나뉘어 있었다. 양나라 무제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리울 만큼 신심(信心)이 대단하여 항상 가사(袈裟)를 걸치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강의하고 또 오경의주(五經義注) 2백 여권을 몸소 짓고, 그 밖의 많은 저술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양무제는 예언에 따라 오래도록 기다려왔는데, 마침내 달마대사를 만나자 먼저 “짐(朕)은 절을 세우고 경전(經典)을 사서(寫書)하며 승려들에게도 베풀어 왔는데, 무슨 공덕(功德)」이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달마는 “공덕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대사에게 물었다.
-이 뿜어버리지 못하고 우물쩍거리는 자야! 장경각 번역: 이런 멍청한 놈.

舉梁武帝問達磨大師〔說這不唧(口+留)漢〕

“무엇이 성제(聖諦) 성제(聖諦)란 속제(俗諦)의 반대말로 곧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는 이치를 일컫는다. 참된 진실은 부동(不動)이고 무작(無作)이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성제란 곧 번뇌장이 다한 저 십지(十地)의 보살이 아는 일승일심(一乘一心)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공용(功用)과 불공용(不功用)의 차이가 있으니, 양무제가 묻는 자리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일의(第一義) 제일의제(第一義諦): 『인왕경소』에서는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님이 곧 제일의제이고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님이 곧 제일의제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의 각파에 따라서 여기에 대한 정의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통상적으로 속제(俗諦)에 대한 대칭으로 승의제(勝義諦), 진제(眞諦), 성제(聖諦), 열반(涅槃), 진여(眞如), 실상(實相), 중도(中道), 법계(法界)라고도 불리지만, 경에 따라서는 속제와 진제, 그리고 제일의제를 삼제(三諦)로 구분하기도 한다.
입니까?”
-이 무슨 나귀를 묶는 말뚝인가?
如何是聖諦第一義〔是甚繫驢橛〕

“확연무성(廓然無聖)! 확연무성(廓然無聖): 텅 비고 드넓어 성제(聖諦)도 없다. 확연(廓然)은 곧 활연(豁然)과 같다. 곧 활짝 열리다, 환하게 트이다, 의문이 풀려 막힘이 없이 밝다는 뜻이다. 예) 확연대오(廓然大悟)

-기특하다고 말할 뻔 했다. 화살이 신라를 지났다. 한 스님이 광조에게 물었다.“여래선은 곧 노형(老兄)이 알았다고 하겠으나 조사선은 아직 꿈에도 보지 못했다. 여래선과 조사선은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한 화살이 신라를 지났다.” 이 스님이 헤아리며 의논하려고 하자, 선사는 곧 악! 하였다. (건중정국속등록) 問, 如來禪即許老兄會, 祖師禪未夢見在, 未審如來禪與祖師禪. 是同是別. 師云, 一箭過新羅. 僧擬議. 師便喝. (建中靖國續燈錄) 그렇다면 어디가 신라인가? 흡사 한나라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가히 명백했구나. 장경각 번역: 꽤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 땅으로 날아가버렸구나. 매우 명백하다.

磨云, 廓然無聖〔將謂多少奇特, 箭過新羅, 可殺明白〕

“(그렇다면) 짐을 마주한 자는 누구입니까?”
-얼굴 가득 수치스럽고 당황스럽다. 애써 정신을 차렸구나. 과연 모색하지 못하는구나.
帝曰, 對朕者誰〔滿面慚惶, 強惺惺果然, 摸索不著〕

“모르겠습니다.”
-돌 돌(咄): 꾸짖는 소리, 탄식 또는 놀람을 나타내는 소리.
! (질문을) 거듭해도 반 푼어치도 되지 못한다. 장경각번역: 거듭해봤자 반푼 값어치도 되질 않는구나.

磨云, 不識〔咄, 再來不直半文錢〕

무제는 계합 의기가 서로 투합하다. 뜻이 통하다.
하지 못했다.
-애석하구나! (그래도) 오히려 조금은 견줄만하다. 장경각 번역: 애석하다. 아직 멀었군.

帝不契〔可惜許, 卻較些子〕

달마대사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에 이르렀다.
-저 들여우 정령 야호정(野狐精): 변화, 환술을 부려 사람을 현혹하는 들여우를 일컫는다.
이 서에서 동으로 건너와 한바탕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였다. (결국)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왔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갔다.
達磨遂渡江至魏〔這野狐精, 從西過東, 不免一場懡(忏-千+羅), 從西過東, 從東過西〕

무제는 나중에 지공(志公)화상에게 이것을 거론하며 물었다.
-가난한 놈이 해묵은 빚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옆 사람에게 눈이 있었다.
帝後舉問志公〔貧兒思舊債, 傍人有眼〕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폐하! 이 사람을 아시겠습니까?”
-(무제는 또한) 지공을 이 나라에서 내쫓아야 비로소 (그 뜻을) 얻으리라. 30방망이를 먹였어야 했다. 달마가 (다시) 왔구나.
志公云, 陛下還識此人否〔和志公趕出國始得, 好與三十棒, 達磨來也〕

“모르겠습니다.”
-도리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받들었구나.
帝云 不識〔卻是武帝承當得達磨公案〕

“그는 관음대사로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합니다.”
-멋대로 설명하는구나. 팔은 바깥으로 굽지 않는다.
志公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胡亂 胡亂: 부주의하다. 경솔하다. 편리를 따르다. [carelessly;casually;at random] 馬虎;草率, 草率, 隨便,
指注, 臂膊不向外曲〕

무제가 후회하며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청하려고 하니,
-과연 붙들어도 머물지 않았다. (앞에서) ‘뿜어버리지 못하고 우물쩍거리는 놈’이라고 말했었다. 장경각 번역: 조금 전에도 ‘멍청한 놈’이라고 말했었건만.

帝悔, 遂遣使去請〔果然把不住, 向道不唧(口+留)〕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 하지 마십시오.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퍼한다. 한꺼번에 나라밖으로 쫓아냈어야 했다. 설봉선사가 대중운력에 등나무 한 단을 지고 가다가 길에서 한 스님이 보자 곧 내려놓았다. 스님이 헤아리려고 하자, 선사는 한 차례 밟아 넘어뜨렸다. 돌아와서 장생스님에게 그대로 말하였다. “내가 좀 전에 한 스님을 밟았는데, 속이 후련하다.” 장생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저 스님을 대신해 열반당으로 내려 가서야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설두스님은 말했다. “장생은 흡사 동쪽 사람이 죽으니, 서쪽 사람이 애도하는 것과 같다. 한 차례 밟아주어야 하리라.”

志公云, 莫道陛下發使去取〔東家人死, 西家人助哀, 也好一時趕出國〕

온 나라 사람이 간다고 해도 그는 역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공 스님을 30방망이 때려야겠다. 발꿈치 아래에서 방광하는 대광명을 알지 못하는구나. 장경각 번역: 발아래에서 큰 광명이 쏟아져 나올지 안 나올지?

闔國人去, 他亦不回〔志公也好與三十棒, 不知腳跟下放大光明〕

【평창】 평창(評唱): 평론하고 노래하다.

달마대사는 멀리서 이 나라에 대승(大乘)의 근기(根器)가 있음을 보시고, 마침내 멀리 바다를 특별히 건너오셔서 다만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였으니, 미혹의 진흙(길)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참)성품을 보(게 하)고 부처를 이루도록 열어보였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곧 자유로운 분수가 있어서 일체의 언어를 따라 구르지 않으리라. 탈체현성(脫體現成) 탈체현성: 탈체란 전체를 벗어남을 말하고, 현성이란 현전성취(現前成就)를 줄인 말이다. 즉 전체를 벗어나 조작이나 닦음이 없이 성품이 자연히 드러나는 경지를 말한다.장경각 번역: 만일 이처럼 이해한다면 바로 자유로운 경지를 얻어 일체의 언어에 좌우되지 않고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리라.
해서는 곧 능히 무제(武帝)와 나눈 대화는 물론 이조(二祖) (혜가)스님의 안심처(安心處) 달마의 안심법문(安心法門): 신광이 소림굴로 찾아왔으나 달마대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눈밭에서 팔을 끊자, 달마대사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 그러자 신광은 물었다. "저는 지금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달마가 말했다. "그 마음을 가져오라. 내가 해결해 주겠다."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이제 그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후에 달마는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주었다.
또한 자연히 보게 될 것이다. 정진(情塵) 정진: 육근과 육진, 내지는 마음의 티끌과 때
으로 비교하고 헤아릴 것도 없이 단칼에 끊고 쇄쇄(洒洒)하고 락락(落落)하다면 쇄쇄락락(洒洒落落): 쇄쇄(洒洒: 灑灑)는 곧 씻어내다, 면면히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다, 역력하고 분명한 모양, 내지는 초탈자재한 모양을 의미한다. 락락(落落)은 높다(高), 많은 모양(眾多), 희소(稀疏)한 상태를 나타낸다. 초탈자재하고 우뚝하게 벗어나다. 예) ‘반드시 그물과 통발을 부수고, 득실과 시비를 일시에 놓아버리고, 쇄쇄락락하다면(洒洒落落) 자연히 저 (설봉의) 올가미를 꿰뚫을 수 있어서 바야흐로 그의 작용처(用處)를 볼 것이다.(得失是非, 一時放下, 洒洒落落, 自然透得他圈繢, 方見他用處).’
어찌 또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잃고 얻음을 따질 것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을 몇 사람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達磨遙觀此土有大乘根器, 遂泛海得得而來, 單傳心印, 開示迷塗,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若恁麼見得, 便有自由分, 不隨一切語言轉, 脫體現成. 便能於後頭, 與武帝對譚, 并二祖安心處, 自然見得. 無計較情塵, 一刀截斷, 洒洒落落, 何必更分是分非, 辨得辨失, 雖然恁麼, 能有幾人.

무제는 일찍이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보통 20권 내지는 30권으로 되어 있는데, 서진(西晉)의 무라차(無羅叉), 축숙란(竺叔蘭) 등이 공역하였다. 『대정장』「제8책(大正藏 第八冊)」에 수록되어있으며 또한 『방광반야바라밀경』, 『방광마하반야경』, 『마하반야방광경』, 『광반야바라밀경』, 『방광경』으로 지어져 있다. 본 경에서는 반야바라밀법과 그 공덕을 기술하고 있으며 중생에게 닦고 배우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을 몸소 강설하였는데, 감응하여 하늘에서 꽃이 수북이 떨어지고 땅이 황금으로 변하였다. 도교를 물리치고 천하에 칙령을 내려 사찰을 일으키고 승려들에게 도첩을 내리고 불법을 몸소 실천하도록 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불렀다.
달마스님이 처음 무제를 마주하자, 무제가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갑자기 더러운 물을 머리위에 뒤집어썼다. 만약 ‘공덕이 없다’는 이 말에서 깨친다면, 그대가 달마 스님을 친견했다고 인정해주겠다. 자 말해보라.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전혀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 이(렇게 말한)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武帝嘗披袈裟, 自講放光般若經, 感得天花亂墜地變黃金. 辨道奉佛, 誥詔天下, 起寺度僧, 依教修行, 人謂之佛心天子. 達磨初見武帝, 帝問, 朕起寺度僧, 有何功德. 磨云, 無功德. 早是惡水驀頭澆. 若透得這箇無功德話, 許爾親見達磨. 且道, 起寺度僧, 為什麼都無功德. 此意在什麼處.

양무제는 누약(婁約)법사, 부대사(傅大士), 소명(昭明)태자와 함께 진(眞)·속(俗) 이제(二諦)를 거론했었다. 교학의 말에 의거해서는, ‘진제(眞諦)로는 있지 않음(非有)을 밝히고 속제(俗諦)로는 없지 않음(非無)을 밝힌다.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 이치가 (원래) 둘이 아님이 곧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교학의 궁극의 현묘한 자리이다.
帝與婁約法師傅大士昭明太子, 持論眞俗二諦. 據教中說, 眞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 眞俗不二, 即是聖諦第一義. 此是教家極妙窮玄處.

양무제는 바로 이 궁극의 자리를 들어서 달마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성제(聖諦) 제일의(第一義: 으뜸, 궁극)입니까?”
이에 달마는 말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천하의 납승들이 (저 성제제일의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달마는 그를 위해 단칼에 끊어주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잘못 알고서 도리어 정혼(精魂: 精氣魂魄)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부릅뜨면서 ‘텅 비어서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다.’고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帝便拈此極則處, 問達磨.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天下衲僧跳不出. 達磨與他一刀截斷. 如今人多少錯會, 卻去弄精魂. 瞠眼睛云, 廓然無聖, 且喜沒交涉.

(나의 스승) 오조 법연(五祖 法演) 오조법연(五祖法演: 미상~1104)선사: 기주 오조법연으로 등씨의 자손이다. 백운 수단 선사(1025~1072)의 법을 이었다. 대감(大鑑: 혜능) 이하 제14세로 북송 임제종 양기파 스님으로 35세에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제방을 참방하고 성도에 이르러 『백법(百法)』, 『유식(唯識)』을 익히고 원조 종본(圓照宗本)을 찾아뵈었다. 후에 부산법원(浮山法遠)을 참례하고 다시 백운수단(白雲守端)선사에 몸을 던져서 인가를 받았다. 법을 이는 자로서는 불안청원(佛眼清遠), 태평혜근(太平慧懃), 원오극근(圜悟克勤)으로 ‘법연 아래의 세 부처(法演下三佛)’라고 칭하였다. 저서로는 『법연선사어록』4권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말했다.
“오직 확연무성을 만약 사람이 사무치게 꿰뚫는다면 집으로 돌아가 온좌(穩坐: 편하게 앉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일등으로 갈등(葛藤)을 짓는다면, 그 사람의 칠통을 타파하도록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달마는 (이) 가운데에서 기특(奇特) 기특(奇特): 범어梵語 아사리이(Āścarya: 阿闍理貳), 또한 알부다(遏部多: Adbhuta)라고도 한다. 번역하면 ‘기특(奇特)’으로 ‘유일하여 짝이 없다’는 말이며 ‘희유’하고 ‘미증유(未曾有: 일찍이 없었다)’함을 일컫는다. 『불소행찬(佛所行讚)』四권: ‘미증법을 알면 기특한 생각을 일으킨다(知得未曾法, 而起奇特想).’ 『현우경(賢愚經)』八권: ‘여래가 세상에 출현함은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如來出世,甚奇甚特).’ ‘여래가 세상에 출현함은 참으로 기특함이다(如來出世, 實復奇特).’
하였다.” 장경각 번역: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말씀을 꿰뚫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본래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리라. 똑 같이 언어문자를 사용하면서도 무제를 위해 무명의 칠통을 깨뜨려주었으니, 그 중 달마스님은 그래도 훌륭하시구나.

때문에 말했다.
“한 구절(一句)을 참구해 꿰뚫는다면 천 구절 만 구절을 일시에 꿰뚫고 자연히 앉아서 (모든 성인의 부류를) 끊고 (천하를) 평정한다.” 장경각 번역: 이와 같이 하면 자연히 꼼짝달싹 못하게 하여 콱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은 말했다.
“분골쇄신이라도 아직 잔을 주고받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장경각 번역: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서져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니 한 구절을 분명히 깨달으면 백억 법문을 뛰어넘는다.
한 구절에 분명해야 백억을 초월한다.”
五祖先師嘗說, 只這廓然無聖, 若人透得, 歸家穩坐. 一等是打葛藤, 不妨與他打破漆桶. 達磨就中奇特. 所以道, 參得一句透, 千句萬句一時透, 自然坐得斷把得定. 古人道,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달마스님은 그의 머리를 쪼개며 한 차례 내질렀지만 다소 (줄줄) 새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제는 살피지 못하고서 도리어 인아(人我)(의 견해) 두 가지 ‘我’에 대한 견해를 이아견(二我見)이라고 하는데, 즉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그것이다. 이것은 두 종류의 허망한 견해로 두 가지 아견(我見)이라고 부른다. 첫째, 일체범부는 사람의 몸, 내지는 오온이 가립(假立)으로 화합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억지로 주체를 세우고는 그것을 ‘我’라고 계탁하고 사람이라고 여긴다. 곧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의 아체(我體: 나라고 하는 체)가 존재한다는 악견(잘못된 견해)을 갖는 것을 인아견(人我見)이라고 부른다. 둘째, 성문연각 이승의 사람이 모든 법의 공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서 일체법에는 저마다 체성(體性: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성품)이 있다고 계탁한다. 비록 이 사람이 무아의 지혜(無我智)를 얻었어도 오히려 스스로 생사를 두려워하고 허망하게 열반의 법을 (임의로) 취하여 이해한다. 법에서 (임의로) 취하는 견해를 법아견이라고 부른다. (대승기신론) 人我, 法我稱為二我;此二種妄見,則稱二我見, (一)一切凡夫不悟人身乃五蘊假和合,強立主宰,計我為人,即執人有常一我體之惡見,稱為人我見, (二)二乘之人,不了悟諸法之空性,計一切法各有體性, 雖得人無我智,猶自怖畏生死,妄取涅槃之法,於法取見,稱為法我見. (大乘起信論)
로 보았기에 다시 ‘짐을 마주한 자는 누구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그렇지만) 달마스님은 자비심이 너무나 많아 또다시 그에게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무제는 곧 눈동자를 움직였지만 (모르겠다고 한) 낙처(落處: 달마의 뜻)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 이르러 유(有)의 일, 무(無)의 일로 점검해서는 감당하지 못한다. 장경각 번역: 이쯤되면 문제가 있고 없고에 관련없이 말조차 할 수 없다.

達磨劈頭與他一拶, 多少漏逗了也. 帝不省, 卻以人我見故, 再問對朕者誰. 達磨慈悲忒殺, 又向道不識. 直得武帝眼目定動不知落處. 是何言說, 到這裏有事無事, 拈來即不堪.

백운수단(白雲守端: 1025~ 1072) 백운수단(白雲守端: 1025~ 1072)선사: 송나라 시대의 스님으로 형양 갈씨(衡陽葛: 일설에는 周씨라고도 함)로 양기 방회선사(楊岐方會禪師: 992-1049)에게 법을 받았다. 백운수단(1025~1072)스님은 한가로운 기품이 있었다. 젊어서는 상강(湘江) 일대를 돌아다녔다. 이때에 방회선사는 양기에서 운개로 거처를 옮겼는데, 백운스님을 한번 보고는 마음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함께 이야기를 하면 매번 날을 샜다. 방회선사는 문득 물었다. “그대의 삭발은사는 누구인가?” “다능 인욱화상입니다.” “내가 들으니 그가 개울을 건너면서 깨달음이 있었다는데, 게송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는데, 기억하는가?” 수단 곧 암송하였다. “나에게 신비로운 구슬이 한 알 있는데, 오래도록 덮여서 관문의 자물쇠에 수고하였다. 오늘 티끌이 다하고 광채가 나니, 산하 만상을 비춘다(我有神珠一顆 久被塵勞關鎻 今朝塵盡光生 照破山河萬朵).” 양기선사가 크게 웃으며 가버렸다. 수단스님은 놀라서 좌우를 돌아보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날 방장실로 가서 이 일은 다시 물었다. 그때가 마침 정월초하루 아침이었다. 방회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어제(밤에) 들여우를 짓는 것(作夜狐)을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그대는 한 수가 그보다 못하다.” 수단은 또다시 크게 놀라며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사람이 비웃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대는 사람이 비웃는 것을 두려워한다.” 수단은 여기에서 크게 깨달았다. (임간록) 참고) 타야호(打野胡): 『구당기·경종기』에 의하면, 황제는 깊은 밤에 스스로 여우와 살쾡이를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궁중에서는 이것을 ‘타야호’라고 불렀다. 후대에 민간에서는 귀신을 쫓고 삿됨을 몰아내는 것을 ‘타야호’라고 하였다.
스님은 송(頌)하였다.
한 화살로 평소 하나의 수리새를 떨어뜨렸으니
다시 한 화살을 쏘는 것에 넉넉하였다.
곧바로 소실봉 앞으로 돌아가 앉았으니
양(무제)왕이여, 다시 가서 불러오라고 하지 마오.

다시 말했다.
“누가 불러오려는가?”
端和尚有頌云, 一箭尋常落一鵰, 更加一箭已相饒, 直歸少室峰前坐, 梁主休言更去招. 復云, 誰欲招.

양무제가 계합하지 못하자 (달마스님은) 아무도 모르게 (양)나라를 떠났다. 이 늙은이는 그저 부끄러움과 수치만을 당하고서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에 이른 것이다.
帝不契, 遂潛出國. 這老漢只得(忏-千+麼)(忏-千+羅), 渡江至魏.

당시 위나라는 효명제가 왕위에 있었다. 그는 북방 종족으로 성은 척발씨(拓跋氏)였는데, 후에 중국의 성씨로 (개명)하였다.
달마스님은 위나라에 이르러 다시 견해를 내지 않고 곧장 소림으로 건너가서 구년을 면벽하며 이조(二祖) 혜가를 맞이하였다. 달마스님을 그 지방에서는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 벽을 보고 있는 바라문)’이라고 불렀다.
時魏孝明帝當位. 乃此北人種族姓拓跋氏, 後來方名中國. 達磨至彼, 亦不出見, 直過少林, 面壁九年, 接得二祖. 彼方號為壁觀婆羅門.

양무제는 나중에 지공(志公) 지공(志公)화상: 남조시대의 양나라 스님. 금성 주씨(金城朱氏)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도림사에 머물렀다. 승검(僧儉)을 스승으로 삼고 선업(禪業)을 닦았다. 유송태시(劉宋泰始) 년간(466~471)에 홀연히 평상시의 모습을 잃고서 정처없이 떠돌며 장발을 길게 하였다. 때때로 혹 시를 짓고 예언적인 말을 내뱉으니, 사방에서 백성들이 다투어서 길흉을 물었다. 이때에 그를 ‘지공부(誌公符)’라고 칭하였는데, 제무제(齊武帝)가 민중을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었는데, 역시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를 확인하기 감옥으로 가보니, 여전히 그는 감옥 안에 있었다. 나중에 양무제(梁武帝)가 금지령을 풀고 예의를 갖추고서 섬기었다. 입적해서는 영곡사(靈谷寺)에 탑을 안장하였다. 저서에는 『십이시가(十二時歌)』, 『대승찬(大乘贊)』, 『십사과송(十四科頌)』등이 있다.
스님에게 (달마를) 묻자, 지공스님은 ‘폐하! 이 사람을 아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무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자 말해보라. 이것은 달마스님이 말한 ‘모르겠습니다!’고 한 것과 같은가, 다른가? 비슷하다면 비슷하겠지만 같다고 하면 옳지 않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잘못 알고서 “앞에서는 달마스님이 선(禪)으로 대답한 것이고, 뒤에서는 무제가 지공스님에게 대답한 것으로, 즉 ‘서로 아는 사이인가?’의 ‘아는가?’에 대한 답변이다.”라고 한다. 또한 아무런 상관이 없다.
梁武帝後問志公, 公云, 陛下還識此人否. 帝曰, 不識. 且道與達磨道底, 是同是別. 似則也似, 是則不是. 人多錯會道, 前來達磨是答他禪, 後來武帝是對他志公, 乃相識之識, 且得沒交涉.

당시 지공스님이 이렇게 물었는데, 자 말해보라.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가? 어째서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 분칠한 오랑캐 꼴을 보는 걸 면하게 하지 않았을까? 무제가 도리어 달마에 대해 (다소) 공손함을 두고서 ‘모르겠습니다.’하니, 지공스님은 이런 (양무제의) 기틀을 보고서 곧바로 이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 심인: 선에서 추구하는 본래적인 뜻을 가리킨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언어를 의지하지 않고 곧 이 마음으로 도장을 삼는 것이다. 때문에 심인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란 곧 부처의 마음이고 도장 인(印)은 곧 인가하다, 인정하다는 뜻이다. 禪之本意, 不立文字, 不依言語, 直以心為印, 故曰心印. 心者佛心. 印者印可印定之義. (불학대사전)
을 전하는 분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였는데, 참으로 뿜어버리지 못하고 우물쩍거리는 사람이다. 그 당시 그가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분이십니다’는 말을 했을 때,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當時志公恁麼問, 且道作麼生祇對. 何不一棒打殺, 免見搽胡. 武帝卻供他款道不識. 志公見機而作, 便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帝悔遂遣使去取, 好不唧(口+留), 當時等他道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亦好擯他出國, 猶較些子.

사람들이 전하기를, ‘지공스님은 천감(天監) 13년(514)에 입적하고, 달마스님은 보통(普通) 원년(520)에야 중국에 왔으니, 7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같은 시기에 서로 만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잘못 전해진 것이다.’라고 하는데, 전하는 기록에 실린 바에 의거할 뿐, 여기서는 그 사실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다만 그 요점만을 알면 되는 것이다.
人傳, 志公天鑒十三年化去, 達磨普通元年方來, 自隔七年, 何故卻道同時相見. 此必是謬傳. 據傳中所載, 如今不論這事, 只要知他大綱.

말해보라, 달마스님이 관음인가? 지공스님이 관음인가? 어느 쪽이 참으로 관음인가? 이미 (둘 다) 관음이라면 어째서 (하나가 아니고) 둘이나 되는가? 어찌 두 사람에 그치겠는가? 무리를 이루고 한 부대가 될 것이다.
且道達磨是觀音, 志公是觀音, 阿那箇是端的底觀音. 既是觀音, 為什麼卻有兩箇. 何止兩箇, 成群作隊.

당시 후위(後魏)의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보리유지삼장(菩堤留支三藏)은 달마스님과 함께 법거량을 했는데, 달마스님은 모양으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편협한 그릇으로 헤아리며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서로 앞 다투며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서 여러 차례 독약으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기를 여섯 번째(의 시도)에 이르렀는데, 교화의 인연이 이미 다하고 법을 전할 사람(혜가)을 얻었기에 마침내 다시 피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으니,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서 장례하였다.
時後魏光統律師, 菩提流支三藏, 與師論議, 師斥相指心. 而褊局之量, 自不堪任, 競起害心, 數加毒藥, 至第六度. 化緣已畢, 傳法得人, 遂不復救, 端居而逝, 葬於熊耳山定林寺.

후위(後魏)의 송운(宋雲)이라는 사신은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에서 손에 한쪽 신발을 들고 가는 대사를 만났다.
後魏宋雲奉使, 於蔥嶺遇師手攜隻履而往,

무제는 대사를 추모하여 스스로 비문을 지었다.

아!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며
마주해도 마주한 것이 아니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원망스럽고 한스럽구나.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마음이 있다면 영겁토록 범부에 얽매이고,
마음이 없다면 찰나에 묘각(妙覺)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에 이르러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 마침내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일체를 버리지도 않고 일체를 취하지도 않는 깨달음이기 때문에 묘각이라고 이름한다.
에 오르리라.
武帝追憶, 自撰碑文云, 嗟夫, 見之不見, 逢之不逢, 遇之不遇, 今之古之, 怨之恨之. 復讚云, 心有也, 曠劫而滯凡夫, 心無也, 剎那而登妙覺.

자 말해보라. 달마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잘못 지나쳐서는 알지 못하리라. 장경각 번역: 서로 지나쳤는데도 모르다니...

且道, 達磨即今在什麼處, 蹉過也不知.

【송】 송(頌): 화두에 대해 게송을 붙여 노래한 것을 말한다. 이 벽암록은 100칙의 화두에 대해서 설두 중현선사가 송을 붙이고 원오극근선사가 평창을 붙여서 이루어진 글이다. 두 선사는 선(禪)의 양대산맥인 마조계와 석두계의 만남과도 같다. 원오극근선사는 마조계 임제종 양기파 선사이고 설두 중현선사는 석두계 운문종의 선사이다.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선사: 북송시대의 하북(河北)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호는 상통(常通) 또는 항통(恒通)이다. 명주 설두중현선사: 지문광조(智門光祚)선사의 법을 이었다. 대감(大鑑: 혜능) 이하 제10세에 익주(益州) 보안원(普安院) 인선(仁詵)스님을 따라서 출가하였다. 후에 지문광조선사를 참례하고서 법을 얻었다. 오문(吳門)의 동정(洞庭)에 머물다가 사명(四明)의 설두산으로 옮겼다. 낭야혜각(瑯邪慧覺)과 함께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칭하였으며 입적한 후에는 인종황제가 ‘명각(明覺)선사’라는 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동정어록』, 『설두개당록』, 『폭천집』, 『조영집』, 『송고집』, 『염고집』, 『설두후록』등이 있다. 법은 천의의회(天衣義懷), 보본유란(報本有蘭) 등 6인에게 전하였다.

성제(聖諦)의 확연(廓然: 텅 빔)이여
-화살이 신라를 지났다. 아이쿠! 놀람을 표시하다. 여기서는 스스로 한 말에 대해 자성의 의미가 있겠다. 예: 咦,你什么时候来的? 어, 너 언제 왔니?

聖諦廓然〔箭過新羅, 咦〕

어떻게 핵심을 가려내리오.
-(벌써) 지나쳤다. 가려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何當辨的〔過也, 有什麼難辨〕

짐을 마주한 자는 누구인가?
-다시 (물어)와서도 반 푼어치도 안 된다. 또다시 이처럼 (달마는) 가리라.
對朕者誰〔再來不直半文錢, 又恁麼去也〕

도리어 ‘모른다!’고 하였다.
-(천하 가운데) 세 사람 네 사람이 (뜻에) 적중하리라. 장경각 번역: 서너 명이 모두 독화살에 맞았다.
돌! 꾸짖는 소리, 탄식 또는 놀람을 나타내는 소리.

還云不識〔三個四個中也, 咄〕

그리하여 어둠에 강을 건너니
-사람의 콧구멍을 뚫지 못하면 도리어 사람에게 콧구멍이 뚫린다. 창천! 창천! 본래는 ‘하늘, 봄하늘’의 의미이다. 天, 上蒼, 春天. (漢典) 장경각 번역: 아이고, 아이고!
참으로 대장부도 아니다.
因茲暗渡江〔穿人鼻孔不得, 卻被別人穿, 蒼天蒼天, 好不大丈夫〕

생가시밭을 어찌 면하랴.
-발아래에 이미 깊이가 몇 장이나 (가시밭이) 우거졌다.
豈免生荊棘〔腳跟下已深數丈〕

온 나라 사람이 뒤쫓아도 다시 오지 않음이여!
-(여기에는) 두 겹의 공안이 있다. 어떻게 추격하려는가. (달마는) 어디에 있는가? 대장부의 기개는 어디에 있는가? 장경각 번역: 뒤쫓아서 무엇 하겠는가? 어느 곳에 있는가? 대장부의 기상은 어디 갔는가?

闔國人追不再來〔兩重公案, 用追作麼 ‘작마생’의 약어. 의문사, 어떠한가의 의미. 作麼生之略. 疑問之詞, 猶言如何.
, 在什麼處, 大丈夫志氣何在〕

(무제는) 천고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였다.
-손을 바꾸어 가며 가슴을 치고 허공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는구나.
千古萬古空相憶〔換手槌胸, 望空啟告〕

아쉬워하지 말라.
-무슨 말을 하려는가? 귀신굴 속에서 살림살이를 지으려는가? 장경각 번역: 무슨 짓인고, 귀신의 소굴 속에서 살려 하다니.

休相憶〔道什麼, 向鬼窟裏作活計〕

맑은 바람이 도처에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과연 생각한대로, 과연. 설정된 미래의 결과나 남의 주장에 대하여 그 실현성이나 개연성을 의심할 때 쓰는 말.
이구나! 저 설두스님이 풀 속에서 구르는군.
清風匝地有何極〔果然, 大小雪竇向草裏輥〕

설두스님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여기에 오히려 (달마)조사가 있는가?”
-그대는 그에게 판결을 내려는가? 장경각 번역: 그대는 자백을 번복하려고 하는가? 아직도 이 짓거리냐!
오히려 이런 거동을 짓는군.
師顧視左右云, 這裏還有祖師麼〔爾待番款那, 猶作這去就)

스스로 대답하였다.
“있다!”
-보살의 노고를 무너뜨리는구나. 장경각 번역: 헛수고를 하는군.

自云有〔塌薩阿勞〕

“(달마를) 불러서 노승의 다리를 씻게 해라.”
-다시 (달마를) 삼십 방망이로 쫓아내도 분수 밖은 아니다. (설두가) 이런 거동을 지어서는 그래도 조금 비교할만하다. 장경각 번역: 이런 짓하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군.

喚來與老僧洗腳〔更與三十棒趕出, 也未為分外, 作這去就, 猶較些子〕

【평창】
설두스님이 이 공안을 노래한 것을 보면 태아보검(太阿劍)을 들고 능숙하게 춤을 추는 것과 같다. 허공을 향하여 이리저리 휘둘러도 조금도 칼날에 (몸을) 다치지 않는다. 이러한 솜씨가 없었다면 칼을 들기만 해도 곧바로 칼끝에 상하고 손을 다쳤을 것이다. 만약 눈을 갖춘 자라면 그가 한 차례 (태아보검을) 잡고 한 차례 어루만지고서 한 차례 칭찬하고 한 차례 내질렀다는 것을 볼 것이다. 그저 네 구절만으로 한 칙의 공안을 처리한 것이다.
대체로 송고(頌古) 옛 화두들에 대해 게송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란 그저 멀리 돌아서 선(禪)을 설명하는 것이고, 염고(拈古) 옛 화두들을 거론하고 평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염고집(拈頌集)이란 옛 선사들의 법거량을 오래도록 살피고 음미하고서 후대사람들이 여기에 송고와 염고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평하는 구절들을 모은 글을 말한다. 이 벽암록 또한 설두중현선사의 송고와 원오극근선사의 염고 내지는 평창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란 대요(大綱: 대략, 요체)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且據雪竇頌此公案, 一似善舞太阿劍相似. 向虛空中盤礡, 自然不犯鋒鋩. 若是無這般手段, 纔拈著便見傷鋒犯手. 若是具眼者, 看他一拈一掇, 一褒一貶, 只用四句, 揩定一則公案. 大凡頌古只是繞路 구불구불 멀리 돌아가는 길. to make a detour, to take the long route.
說禪, 拈古大綱據款結案而已.

설두스님이 한 차례 그를 내질러 머리를 쪼개고서 곧 말하였다.
“성제(聖諦)의 확연(廓然: 텅 빔)이여, 어떻게 (이) 핵심을 가려내리오.”
설두스님이 첫 구절에서 이 한 구절을 붙인 것은 기특 기이하고 특별하다.
하다고 하겠다.
雪竇與他一拶, 劈頭便道, 聖諦廓然, 何當辨的. 雪竇於他初句下, 著這一句, 不妨奇特.

말해보라, 결국 어떻게 핵심을 걸려내겠는가. 설령 무쇠 눈과 구리 눈동자라도 찾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알음알이(情識: 有情의 識)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운문스님은 말했다.
“마치 둘이 부딪쳐서 나는 불꽃, 번개가 번쩍하는 불빛과도 같다.”
이와 같아서는 마음의 기틀(心機), 의식(意識), 정상(情想)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대가 입을 연다고 해도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계교를 낼 때, (벌써) 수리매는 신라를 지나갔다.
且道, 畢竟作麼生辨的. 直饒鐵眼銅睛, 也摸索不著. 到這裏, 以情識卜度得麼. 所以雲門道, 如擊石火, 似閃電光. 這箇些子, 不落心機意識情想. 等爾開口, 堪作什麼. 計較生時, 鷂子過新羅.

설두스님은 말했다.
“그대들 천하납승들이 어찌 핵심을 가려내리오. 짐을 마주한 자는 누구인가? 도리어 (달마는) ‘모른다’고 하였다.”
이것은 설두스님이 몹시도 노파심이 간절하여서 거듭 사람을 위하는 곳에 처한 것이다.
雪竇道, 爾天下衲僧, 何當辨的, 對朕者誰, 著箇還云不識, 此是雪竇忒殺老婆, 重重為人處.

자 말해보라. ‘텅 비었다(廓然)’는 것과 ‘모른다(不識)’는 것은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만약 (일을)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 처지, 입장, 경계)에서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만약 아직 마치지 못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두 개의 말뚝에 묶일 것이다. 제방에서는 흔히 말하기를, ‘설두가 (공안에 대해서) 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라고 하는데, 이는 저 네 구절로 공안을 모두 노래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且道, 廓然與不識, 是一般兩般. 若是了底人分上, 不言而諭, 若是未了底人, 決定打作兩橛.諸方尋常皆道, 雪竇重拈一遍, 殊不知, 四句頌盡公案了.

그 이후는 설두스님의 자비심으로 말미암아서 송을 지어 자취를 남긴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에 강을 건너니,
생가시밭을 어찌 면하랴.”
後為慈悲之故,頌出事跡. 因茲暗渡江, 豈免生荊棘.

달마스님이 본래 이 나라에서 사람들에게 끈끈하게 달라붙은 것을 풀어주고, 결박을 제거하고, 못을 빼고 쐐기를 뽑아주고, 가시덤불을 없애주려 왔는데, 도리어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생가시밭을 말했을까? 이것은 그저 당시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모든 사람들의 발아래에도 (가시덤불이) 이미 몇 장이나 깊기 때문이다.
達磨本來茲土, 與人解粘去縛, 抽釘拔楔, 鏟除荊棘, 因何卻道生荊棘. 非止當時, 諸人即今腳跟下, 已深數丈.

“온 나라 사람이 뒤쫓아도 다시 오지 않음이여!
(무제는) 천고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였다.”
가히 장부라고 할 수 없다.
闔國人追不再來, 千古萬古空相憶, 可殺不丈夫.

말해보라, 달마스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만약 달마스님을 보았다면 설두스님이 뒤 구절에서 사람을 위하는 곳도 볼 것이다.
且道, 達磨在什麼處, 若見達磨, 便見雪竇末後為人處.

설두스님은 사람들이 정견(情見) 망정으로 보는 것. 妄情之所見也[佛學大辭典(丁福保)]
을 따를 것을 염려하여 관건(關鍵: 관문의 빗장)을 돌려서 자기의 견해를 드러내어 말했다.
“아쉬워하지 마라.
맑은 바람이 도처에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이미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그대들 발아래의 일 그대들이 밟고 서 있는 자리는 여기에 견주어서 어떠한가?
은 또한 어떠한가?
雪竇恐怕人逐情見, 所以撥轉關捩子, 出自己見解云, 休相憶, 清風匝地有何極. 既休相憶, 爾腳跟下事, 又作麼生.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지금 이 안에서는 도처에 맑은 바람이 천상천하에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천고만고의 일을 들어서 (사람의) 면전에 던졌으니, 그 당시에만 다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금) 그대들 모든 사람들의 분상에서도 또한 어찌 다함이 있을 것인가?
雪竇道, 即今箇裏匝地清風, 天上天下有何所極. 雪竇拈千古萬古之事, 拋向面前, 非止雪竇當時有何極, 爾諸人分上亦有何極.

그는 또한 사람들이 여기에 집착할 것을 염려하여 거듭 방편을 써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오히려 달마가 있는가?”
스스로 대답하였다.
“있다.”
설두스님은 이 안에 이르러 이 안은 곧 여기이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가? 달마인가? 설두인가? 같은가? 다른가?
사람을 위하는 간절함이 절절했다고 하겠다. 장경각 번역: 설두스님은 여기에 이르러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망울져 있다.

또한 스스로 말했다.
“불러서 노승의 다리를 씻게 해라.”
사람의 위광(威光: 위엄, 체통)을 몹시도 깎아내렸는데, (달마는) 당시에 본분(本分)의 수각(手腳) 본분납승의 팔과 다리, 곧 솜씨, 역량
을 베풀었다면 좋았으리라.
他又怕人執在這裏, 再著方便高聲云, 這裏還有祖師麼. 自云有. 雪竇到這裏, 不妨為人, 赤心片片. 又自云, 喚來與老僧洗腳. 太殺減人威光, 當時也好, 與本分手腳.

말해보라, (이렇게 말한) 설두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노새라 불러도 옳고, 말이라고 불러도 옳고, 조사라고 불러도 옳다. 무슨 명칭인들 멀겠는가?
종종 설두스님이 조사를 부려먹였다고들 말하는데, 전혀 상관이 없다. 자 말해보라, 결국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다만 늙은 오랑캐가 지(知)했다고는 해도 늙은 오랑캐가 회(會)했다고 하지는 못한다. 장경각 번역: 늙은 오랑캐(달마스님)가 불법을 알았다는 것은 인정하나 늙은 오랑캐가 체득했다고는 할 수 없다.
확연무성으로 전신을 드러내어얼굴을 보고 올렸어도 벌써 강나루를 사이에 두었다.양나라 국경과 위나라 땅을 막론하고하나의 꽃에 다섯 장의 잎이 자연스러운 봄이다. (운암 인)廓然無聖露全身, 覿面相呈已隔津.莫問梁邦并魏苑, 一華五葉自然春. (雲巖因) 범부와 성인에 뒤엉킨 정(情)을 아직 잊지 못해확연무성(廓然無聖)에 곧장 놀라고 광란하였다.양왕의 전각 아래에서 아무런 책략이 없어지금 호인(胡人)이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천대 도)凡聖縈纏情未忘, 廓然無聖便驚狂.梁王殿下無謀略, 剛被胡人亂一場. (泉大道)

且道, 雪竇意在什麼處. 到這裏, 喚作驢則是, 喚作馬則是, 喚作祖師則是. 如何名邈, 往往喚作雪竇使祖師去也, 且喜沒交涉. 且道, 畢竟作麼生,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제51칙
암두의 말후구(巖頭末後句)

【수시】
잠깐이라도 시비가 있다면 어지럽게 마음을 잃고,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면 또한 모색하지 못한다. 자 말해보라, 방행(放行: 놓아주다) 선사가 제자를 이끄는 방법에는 방행과 파주가 있다. 방행(放行)이란 ‘통행을 허락하다, 지나가게 하다, 자유롭게 하게 하다, 만물을 그대로 두다’라는 뜻이 있고, 파주(把住)란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을 빼앗다, 한 물건도 두지 않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
하여야 옳은가? 파주(把住: 놓아주지 않다)하여야 옳은가? 장경각 번역: 시비가 생기자마자 혼란스러워 마음을 잃게 되고, 단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다. 말해보라. (설명을) 늘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이 안에 이르러 만약 실오라기만큼이라도 해로(解路: 분별사량)가 있다면 오히려 언전(言詮: 말과 설명)에 막히고 기경(機境: 기틀과 경계)에 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두 풀을 의지하고 나무를 기대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설령 독탈처(獨脫處: 홀로 벗어나는 곳)에 이르렀다고 해도 만리 밖에서 고향의 관문을 바라보는 처지를 아직 면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한 뜻을 가려내어) 얽어낼 수 있겠는가? 만약 아직 얽어내지 못한다면, 그저 잠깐동안 이성공안(理成公案: 현성공안)에 주의를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 시험 삼아 거량해보라. 장경각 번역: 시비가 생기자마자 혼란스러워 마음을 잃게 되고, 단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다. 자 말해보라. (설명을) 늘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 이를 알겠느냐? 아직 알지 못했다면 (설명이 붙여지지 않는 채로) 그대로 있는 공안을 깨치도록 하라!

垂示云, 纔有是非, 紛然失心, 不落階級, 又無摸索. 且道放行即是, 把住即是. 到這裏, 若有一絲毫解路, 猶滯言詮, 尚拘機境, 盡是依草附木. 直饒便到獨脫處, 未免萬里望鄉關. 還搆得麼. 若未搆得, 且只理會箇理成公案. 試舉看.

【본칙】
설봉스님이 암자에 머무를 때에 두 스님이 예를 갖추기 위해 찾아왔다.
-무엇을 하는가? 일장령(一狀領) 일장령(一狀領): 죄인을 처벌하는 판결문.
이 지나갔다.
舉,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作什麼, 一狀領過〕

설봉스님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암자의 (사립)문을 밀고서 몸을 내밀며 말했다.
“무엇인가?”
-귀신의 눈동자이고 구멍 없는 피리이다. 머리를 들어 올리고 뿔을 (머리위에) 썼다. 장경각 번역: 귀신같이 잘도 보는군. 구멍 없는 피리이다. 꽉 들이받았다.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麼〔鬼眼睛, 無孔笛子, 擎頭戴角〕

그 스님들 또한 말했다.
“무엇입니까?”
-진흙탄알에 방탄판이다. 화살과 칼끝이 서로 (팽팽하게) 버티었다. 장경각 번역: 진흙으로 만든 탄환이로군. 방음 장치가 된 판때기(氈拍板)이다.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절묘하군.

僧亦云, 是什麼〔泥彈子氈拍板, 箭鋒相拄〕

설봉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
-진흙 속에 가시가 있었다. 마치 용에게 다리가 없고 뱀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처리하기 어렵다.
峰低頭歸庵〔爛泥裏有刺, 如龍無足, 似蛇有角, 就中難為措置〕

그 스님들이 나중에 암두(巖頭)스님에게 이르자,
-반드시 묻고 지나가야 비로소 얻는다. 같은 길을 가는 자가 바야흐로 안다.
僧後到巖頭〔也須是問過始得, 同道方知〕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반드시 작가여야 비로소 얻는다. 이 자들이 늘 패하고 모자랐다. 만약 (암두스님을) 함께 참례하지 않았다면 놓쳤을 것이다. 장경각 번역: 반드시 작가 선지식이라야만 대답할 것이다. 이자가 번번이 실패한다. (설봉스님과 함께) 동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 객승을) 그냥 놓쳐 보낼 뻔했다.

頭問, 什麼處來〔也須是作家始得, 這漢往往納敗闕, 若不是同參, 洎乎放過〕

“영남(嶺南)에서 옵니다.”
-무슨 소식을 전하려는가? 반드시 저 소식을 통해야 한다. 설봉스님을 보았는가?
僧云, 嶺南來〔傳得什麼消息來, 也須是通箇消息, 還見雪峰麼〕

“설봉스님에게 갔었는가?”
-간파한지 오래이다. 가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頭云, 曾到雪峰麼〔勘破了多時, 不可道不到〕

“갔었습니다.”
-실한 사람을 얻기 어렵다. 두개의 말뚝을 지었다. 장경각 번역: 양쪽(설봉스님과 암두스님)에서 모두 헤어나지 못했군.

僧云, 曾到〔實頭人難得, 打作兩橛〕

“무슨 말이 있던가?”
-곧장 저렇게 가는구나. 장경각 번역: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頭云, 有何言句〔便恁麼去也〕

이 스님들이 앞의 일을 그대로 말했다.
-곧장 저렇게 가서는 (틀림없이) 거듭거듭 패하고 이지러지리라.
僧舉前話〔便恁麼去也, 重重納敗闕〕

암두스님은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입을 벌리면 곧장 후려쳐야 하리라. 콧구멍을 잃었다.
頭云, 他道什麼〔好劈口便打, 失卻鼻孔了也〕

“설봉스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습니다.”
-또다시 패하고 모자랐다. 그대들은 자 말해보라, 그가 어떠한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又納敗闕, 爾且道他是什麼〕

“아차, 내가 당초에 그에게 말후구를 말해주지 않는 것이 후회스럽구나!”
-큰 파도가 끝없이 넓고 아득하고 흰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頭云, 噫我當初悔不向他道末後句〔洪波浩渺白浪滔天〕

“그에게 말해주었다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 늙은이를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둥이가 동료를 이끌고 가서 수미산을 꼭 부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 앞에서 절대로 分曉(清晰, 明白)를 없애는 것을 삼가라. 人前切忌無分曉.
자 말해보라, 그의 권궤(圈繢: 올가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장경각 번역: 문둥이가 짝을 끌고 가는구나. 꼭 그렇지 않다. 수미산이라도 부서질 것이다.’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癩兒牽伴, 不必, 須彌也須粉碎. 且道他圈繢在什麼處〕

그 스님들이 하안거 끝에 이르러 다시 앞의 이야기를 꺼내며 청익(請益: 가르침을 청하다)하였다.
-이미 (정신이) 아득하다. 도적이 떠난 지 오래인데, 도적이 지나간 뒤에 활을 당기는구나.
僧至夏末, 再舉前話請益〔已是不惺惺. 正賊去了多時, 賊過後張弓〕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선상(禪床)을 번쩍 들어 뒤엎어야 했다. 지나갔다.
頭云, 何不早問〔好與掀倒禪床. 過也〕

“감히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 방망이를 애초에 이 스님들이 먹었다면 콧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갇혀 있으면서 지혜를 키웠다. 이미 두 겹의 공안이다. 장경각 번역: 이 방망이를 이 스님에게 먹였어야 한다. 콧구멍을 뚫어버렸다. (하안거 동안) 감옥 속에 틀어박혀 못된 지혜만 키웠구나. 두 번 거듭된 잘못이다.

僧云, 未敢容易〔這棒本是這僧喫, 穿卻鼻孔, 停囚長智, 已是兩重公案〕

“설봉스님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어도,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 장경각 번역: 설봉스님이 나와 한 가지(덕산스님의 제자이므로)에서 나기는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하늘을 뒤덮고 땅을 덮었다.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漫天網地〕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것일 뿐이다.”
-한 배를 탄 사람을 속였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거의 해명하지 못할 뻔하였다.
要識末句後, 只這是〔賺殺一船人, 我也不信, 洎乎分疏不下〕

【평창】
대체로 종문의 가르침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저 (눈앞에) 마주한 기틀을 가려내야 하고, 진퇴(進退: 나아가고 물러남)와 시비(是非: 옳고 그름)를 알아야 하고, 살활(殺活: 죽이고 살림)과 금종(擒縱: 사로잡고 놓아줌)을 밝혀야 한다.
만약 문득 안목이 미려마라(迷黎麻羅: 검은 삼베실로 짠 그물에서 미혹해지다)하다면, 가는 곳마다 물음을 만나면 곧 묻고, 또한 대답을 만나면 곧 대답한다고 할지라도 콧구멍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大凡扶豎宗教, 須是辨箇當機, 知進退是非, 明殺活擒縱. 若忽眼目迷黎麻羅, 到處逢問便問, 逢答便答, 殊不知鼻孔在別人手裏.

예컨대,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이 덕산스님을 동참(同參: 같이 참례하다)한 것처럼 이 (두) 스님들도 설봉스님을 참례하였지만, (이들의) 견해가 그저 그러할 뿐이어서 급기야 암두스님을 뵈었어도 역시 일사(一事: 일대사)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부처의 일대사를 성취하지 못하다.

(사람들이) 저 두 노숙(설봉, 암두)을 (어지러운 시비로) 번거롭게 하며 한 차례 묻고 한 차례 대답하고, 한 차례 사로잡고 한 차례 놓아주기를 지금에 이르렀어도, 천하 사람들은 절각효와(節角淆訛: 왜곡됨)를 밝히지 못하였다. 자 말해보라, 절각효와(節角淆訛) 절각효와(節角淆訛): 모서리의 이지러짐, 즉 절묘한 곳의 왜곡. 7칙 각주 참조.
가 어느 곳에 있는가? 장경각 번역: 부질없이 두 노스님을 번거롭게 하면서 묻고 답하고 사로잡고 놓아주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천하인에게 까다롭고 배배 고이게 하여 이를 밝히려 해도 밝힐 수 없게 만든 것이다.

只如雪峰巖頭, 同參德山, 此僧參雪峰, 見解只到恁麼處, 及乎見巖頭, 亦不曾成得一事. 虛煩他二老宿, 一問一答, 一擒一縱, 直至如今, 天下人成節角淆訛, 分疏不下. 且道節角淆訛, 在什麼處.

설봉(雪峰)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선사: 당나라 스님.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선사의 법을 이었다. 22칙 각주 참조.
스님이 제방을 두루 다니다가 (마침내) 말후에 오산(鰲山)의 객잔에서 암두스님으로 인하여서야 (비로소) 격발하여 바야흐로 초절대철(勦絕大徹: 다 끊고 크게 통하다)을 얻었다. 암두(巖頭) 암두전활선사: 덕산선사의 법을 이었다. 5칙 각주 참조.
스님은 후에 불교사태(沙汰: 당나라 무종의 법난으로 환속을 당하다)를 만나 호숫가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강 양쪽 언덕에 판을 걸어놓고는 사람이 건너려고 판을 한 차례 두드리면 암두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저쪽으로 건너려고 하는가?”
그리고는 곧 갈대 사이에서 노를 매고는 춤을 추며 나왔다.
雪峰雖遍歷諸方, 末後於鰲山店, 巖頭因而激之, 方得勦絕大徹. 巖頭後值沙汰, 於湖邊作渡子, 兩岸各懸一板, 有人過敲板一下. 頭云, 爾過那邊. 遂從蘆葦間, 舞棹而出.

(한편) 설봉스님은 영남(嶺南)으로 돌아가 암자(庵: 작은 초가집)에 머물렀다. 이 스님들 역시 오랫동안 참구한 사람들이었다. 설봉스님은 (이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암자의 (사립)문을 밀치고는 몸을 내밀며 말했다.
“무엇인가?”
오늘날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곧장 그 말을 곱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스님들 역시 괴짜였기에 그저 그에게 말했다.
“무엇입니까?”
설봉스님은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
雪峰歸嶺南住庵, 這僧亦是久參底人. 雪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麼. 如今有底, 恁麼問著, 便去他語下咬嚼. 這僧亦怪, 也只向他道是什麼, 峰低頭歸庵.

때때로 (이것을) ‘무어회거(無語會去: 말없이 알아차리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스님들은 모색하려고 해도 모색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설봉스님이 이 스님들에게 한번 질문을 받고는 말없이 대답을 못하고서 암자로 돌아갔다.
암자로 돌아갔다.”고 말하는데, 설봉스님의 뜻(意) 설봉스님이 그렇게 돌아간 의도에는 독해가 있었다.
에는 독해처(毒害處: 독살스러운 곳)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저) 설봉스님이 비록 편의(便宜)를 얻었어도 어찌할 것인가! 몸을 감추었어도 그림자가 노출된 것을.
往往喚作無語會去也, 這僧便摸索不著, 有底道, 雪峰被這僧一問直得, 無語歸庵, 殊不知雪峰意有毒害處. 雪峰雖得便宜, 爭奈藏身露影.

이 스님들은 후에 설봉스님을 하직하고 이 공안을 품고서 암두스님에게 묻기 위해 그곳에 이르렀다.
암두스님은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영남에서 옵니다.”
“설봉에 들른 적이 있는가?”
만약 설봉스님을 보려고 한다면, 다만 (암두스님의) 이 하나의 물음에서 급히 눈을 부치고 보아야 한다.
這僧後辭雪峰, 持此公案, 令巖頭判, 既到彼. 巖頭問, 什麼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麼. 若要見雪峰, 只此一問, 也好急著眼看.

그 스님이 말했다.
“간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 있었는가?”
이 말 또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스님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암두)의 어맥을 따라서 구를 뿐이었다.
암두스님이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가?”
“그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암자로 돌아갔습니다.”
이 스님들은 암두스님이 짚신을 신고서 이들의 뱃가죽 속으로 몇 차례나 걸어 들어갔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암두스님이 말했다.
“아차! 내가 당초에 그에게 말후구를 일러주지 않는 것이 후회스럽구나. 만약 그에게 말해주었다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노인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암두스님은 강함을 부축하고 약함을 부축하지 않았다. 삿갓을 쓰고서 곧장 길을 가다.
이 스님들은 여전히 어둠이 가득한 땅(黑漫漫地)에서 흑백을 구분하지 못한 채 뱃가죽에 의심을 (가득) 품고서는 진지하게 말하기를, “설봉스님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장경각 번역: 암두스님도 강한 자(설봉스님)를 부추기고 약한 자(객스님)는 도와주지 않았다. 이 스님은 여전히 깜깜하여 흑, 백을 분별하지 못한 채 마음 속 가득히 의심을 품고서 “설봉스님이 모르더군요”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此語亦不空過, 這僧不曉, 只管逐他語脈轉. 頭云, 他道什麼. 僧云, 他低頭無語歸庵. 這僧殊不知, 巖頭著草鞋, 在他肚皮裏行, 幾回了也. 巖頭云, 噫我當初悔不向他道末後句, 若向他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巖頭也是扶強不扶弱. 這僧依舊黑漫漫地, 不分緇素, 懷一肚皮疑, 眞箇道, 雪峰不會.

여름 안거 끝에 이르러 다시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들어서 암두스님에게 청익하였는데, 암두스님이 말했다.
“어째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이 늙은이에게 계교가 생긴 것이다. 그러자 이 스님들이 말했다.
“감히 쉽지가 않았습니다.”
“설봉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어도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 말후구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이것일 뿐이다.” 사람 앞에서 절대로 분효(分曉)를 없애는 것을 삼가라.

암두스님은 참으로 눈썹을 아끼지 않았다. 낙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결국 (이것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겠는가?
至夏末, 再舉前話, 請益巖頭. 頭云, 何不早問, 這老漢, 計較生也.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巖頭太殺不惜眉毛, 諸人畢竟作麼生會.

설봉스님은 덕산(德山)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선사: 용담숭신선사의 법을 잇다. 5칙 각주 참조.
스님의 회상에서 반두(飯頭: 공양을 짓는 일) 소임을 보았다.
하루는 재(齋: 점심 공양)가 늦어지자, 덕산스님이 발우를 들고는 법당(法堂: 설법당)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설봉스님이 말했다.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
덕산스님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설봉스님이 (이것을) 암두스님에게 말하자, 암두스님은 말했다.
“저 덕산이 말후구를 모르는구나.”
덕산스님이 듣고는 시자로 하여금 불렀는데, 암두스님이 방장실에 이르자 물었다.
“그대는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암두스님이 그 말에 대해서 밀계(密啟: 가만히 열어보이다) 밀계: 가만히, 은밀하게, 자세히 열어 보이다, 털어놓다.
하였다.
덕산스님이 다음날 상당하였는데, 평소와는 같지 않았다. 이에 암두스님은 승당 앞에서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구나. 이후로는 천하 사람들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비록 그렇지만 3년뿐이로다.”
雪峰在德山會下作飯頭. 一日齋晚, 德山托缽下至法堂. 峰云, 鐘未鳴鼓未響, 這老漢, 托缽向什麼處去. 山無語低頭歸方丈. 雪峰舉似巖頭. 頭云, 大小德山, 不會末後句. 山聞令侍者喚至方丈問云, 汝不肯老僧那頭密啟其語. 山至來日上堂, 與尋常不同. 頭於僧堂前, 撫掌大笑云, 且喜老漢會末後句. 他後天下人, 不奈他何. 雖然如是, 只得三年.

이 공안 가운데에는 마치 (예전에) 설봉스님이 덕산스님이 (고개를 숙이고 방장실로 돌아가며)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을 본 것과 같았기에 (설봉스님이) 편의(便宜)를 얻었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도적을 지었다. 그가 일찍이 도적을 붙잡았기에 후에 가서 역시 (이처럼) 도적을 지을 줄을 안 것이다.
그러기에 옛사람은 말하였다.
“말후의 한 구절에서 비로소 뇌관(牢關: 생사를 벗어나는 문)에 이른다.”
어떤 자는 ‘암두스님이 설봉스님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는데, 잘못 알았다.
此公案中, 如雪峰見德山無語. 將謂得便宜, 殊不知著賊了也. 蓋為他曾著賊來, 後來亦解做賊. 所以古人道, 末後一句, 始到牢關. 有者道, 巖頭勝雪峰, 則錯會了也.

암두스님은 항상 이 기틀을 써서 대중에게 보이며 말했다.
“눈 밝은 자에게는 과구(窠臼: 정해진 격식)가 없다. 물(物)을 물리치는 것을 상(上)으로 치고 물(物)을 따르는 것을 하(下)로 삼는다.”
이 말후구는 설사 조사를 친견했다고 해도 이해(理會: 알다) 이(理)를 회(會)하다. 곧 회통하다.
를 얻지 못한다.
巖頭常用此機示眾云, 明眼漢沒窠臼, 卻物為上, 逐物為下. 這末後句, 設使親見祖師來, 也理會不得.

덕산스님은 재(齋: 점심공양)가 늦어지자 몸소 발우를 들고 법당(法堂: 법을 설하는 당)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방장실로 돌아갔다.
암두스님이 말했다.
“저 덕산이 말후구가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구나.”
설두스님은 (이것을) 염(拈: 집어서)하여 말했다.
“일찍이 저 독안용(獨眼龍: 명초스님)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독안용은) 원래 다만 일척안을 갖추었을 뿐이다. (그는) 덕산이 저 무치대충(無齒大蟲: 이빨 없는 호랑이)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만약 암두스님이 알고서 깨뜨리지 않았다면 어찌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여러분들은 말후구를 알고자 하는가? 그저 늙은 오랑캐가 지(知)했다고는 해도 늙은 오랑캐가 회(會)했다고는 하지 못한다.”
자고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안이 천차만별하며 (그것이) 마치 형극림(荊棘林: 가시밭 숲)과도 같지만, 그대들이 만약 꿰뚫고 지나갈 수 있다면 천하 사람들이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들은 하풍(下風)에 서 있다. 장경각 번역: 예로부터 지금까지 공안은 가시덤불처럼 천차만별이니, 그대들이 이를 철저히 사무치게 터득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곧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형극림을 아직) 꿰뚫지 못했다면, 저 암두스님이 말한, ‘설봉이 비록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나왔지만 나와 함께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는다. 다만 이 한 구절일 뿐이다.’에서 (뚫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연스러운 출신처(出身處: 생사의 몸을 벗어나다)가 있을 것이다.
德山齋晚, 老子自捧缽下法堂去, 巖頭道, 大小德山, 未會末後句在. 雪竇拈云, 曾聞說箇獨眼龍, 元來只具一隻眼, 殊不知, 德山是箇無齒大蟲. 若不是巖頭識破, 爭知得昨日與今日不同. 諸人要會末後句麼,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自古及今, 公案萬別千差, 如荊棘林相似. 爾若透得去, 天下人不奈何. 三世諸佛, 立在下風. 爾若透不得, 巖頭道,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只這一句自然有出身處.

설두스님은 송하였다.
雪竇頌云,

【송】
말후구(末後句)를
-이미 말 이전이 참되다고 말할 뻔하였다. 엿보려고 해서는 눈이 먼다. 장경각 번역: 언어 이전의 소식인걸! 참되다고 말하려 했더니만 쯧쯧.

末後句〔已在言前, 將謂眞箇, 覷著則瞎〕

그대를 위해 말해보면,
-혀끝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머리가 있으면 꼬리가 없고 꼬리가 있으면 머리가 없다. 장경각 번역: 혀가 땅에 떨어졌다. 말로 할 수 없다.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으며 꼬리만 있고 머리가 없다.

為君說〔舌頭落也, 說不著, 有頭無尾有尾無頭〕
밝음과 어둠이 쌍쌍인 시절이다. 장경각 번역: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

-갈등을 (짓는) 노인이로다. 마치 소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고 호랑이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피차가 이와 같다. 장경각 번역: 말많은 노인이군. 소에 뿔이 없고 호랑이에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이것도 쌍쌍, 저것도 쌍쌍.

明暗雙雙底時節〔葛藤老漢, 如牛無角似虎有角, 彼此是恁麼〕

같은 가지에서 나는 것은 서로 함께 아는데,
-(이는) 어떤 종족인가? 피차가 (서로 간에) 교섭함이 없다. 그대는 소상(瀟湘) 소상: 호남에 위치하다.
으로 향하고 나는 진(秦) 진: 위하(渭河)의 함양(咸陽)에 위치하며 지금의 서안을 가리키다.
으로 향한다.
同條生也共相知〔是何種族, 彼此沒交涉, 君向瀟湘我向秦〕

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아서는 오히려 특별하다. 장경각 번역: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군.

-주장자가 나의 손안에 있다. 어찌 산승을 괴이하다고 하겠는가? 그대들의 콧구멍이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손안에 있는가?
不同條死還殊絕〔拄杖子在我手裏, 爭怪得山僧, 爾鼻孔為什麼在別人手裏〕

오히려 특별해서는
-방망이를 먹어 보겠는가? 무엇을 더듬는가? 장경각 번역: 까맣게 모르는군. -한 방 얻어맞고 싶냐? 알 리가 없고말고.

還殊絕〔還要喫棒麼, 有什麼摸索處〕

황두(黃頭)와 벽안(碧眼)을 잘 감별해야 하리라. 장경각 번역: 석가와 달마도 잘 분별해보아야만 알 수 있네.

-온 대지의 사람들이 칼을 잃고 혀가 꼬인다. 나는 이와 같지만 다른 사람은 오히려 이와 같지 않다. 그저 늙은 오랑캐가 지(知)했다고는 해도 늙은 오랑캐가 회(會)했다고는 하지 못한다.
黃頭碧眼須甄別〔盡大地人亡鋒結舌. 我也恁麼, 他人卻不恁麼.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남북동서에서 귀거래해서는 장경각 번역: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 수습했다. 발 아래 오색 실을 두루고 있다(설두스님이 아직 자취를 못버리네 그려). 그대의 주장자를 빌려다오.

-수(收: 거두다)하였다. 발꿈치 아래이다. 오히려 오색실을 끼고 있다. 그대의 주장자를 (나에게) 달라.
南北東西歸去來〔收, 腳跟下, 猶帶五色線在, 乞爾一條拄杖子〕

깊은 밤 함께 일천 바위봉우리의 눈을 본다. 장경각 번역: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

-오히려 절반쯤의 여정이다. 저 대지에 눈이 가득하다. 도랑을 메우고 웅덩이를 덮지만 아무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다. 장경각 번역: 아직 반 정도뿐이다. 저 대지에 눈이 질펀하듯 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는 사람이 없구나.
그저 눈먼 자일뿐이다. 말후구를 알겠는가? (원오스님이) 곧 (주장자로 선상을) 후려쳤다.
夜深同看千巖雪〔猶較半月程. 從他大地雪漫漫, 填溝塞壑無人會. 也只是箇瞎漢. 還識得末後句麼, 便打〕

【평창】
“말후구를 그대를 위해 말해보면”
설두스님이 이 말후구를 송했어도 그 뜻은 지극히 낙초(落草: 풀에 떨어진)한 모양이라고 하겠다. 노래인 즉 죽이는 노래이지만 그저 털의 무늬를 조금 노래했을 뿐이다. (따라서) 혹 (이 송으로) 꿰뚫어 보려고 해도 (말후구에는) 미치지 못한다.
末後句為君說, 雪竇頌此末後句, 他意極有落草相為. 頌則殺頌, 只頌毛彩些子. 若要透見也未在.

또다시 감히 큰 입을 벌리고서는 곧 말했다.
“밝음과 어둠이 쌍쌍인 시절이다.”
그대들에게 한 가닥 길을 열어주면서, 또한 그대들을 한 구절로 쳐 죽였다. 마지막에서는 다시 그대들을 위해 주석을 붙였다.
更敢開大口便道, 明暗雙雙底時節. 與爾開一線路, 亦與爾一句打殺了也, 末後更與爾注解.

예컨대, 초경(招慶)스님이 하루는 나산(羅山) 복주나산도한(福州羅山道閒)선사: 암두전활(岩頭全奯)선사에게 법을 받다. 속성은 진씨이고 장계(長溪) 사람이다. 어려서 구산(龜山)으로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후에 제방을 다니며 여러 선덕들을 참례하였다. 명초덕겸(明招德謙)선사에게 법을 전하였다.
스님에게 물었다.
“암두스님이 ‘이와 같고 이와 같다! 이와 같지 않고 이와 같지 않다!’라고 했다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나산스님이 부르며 말했다.
“대사!”
“네”
“쌍명역쌍암(雙明亦雙暗: 쌍으로 밝고, 또한 쌍으로 어둡다)입니다.”
초경스님이 감사의 예를 올리고 돌아갔는데, 삼일 후에 다시 (찾아와서) 물었다.
“지난번에는 요행히 화상께서 베푸신 자비를 입었지만 간파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의를 다해 그대에게 (해야 할) 말을 (다) 말했습니다.”
“(부디) 화상께서는 (등)불을 잡고 (저를 위해 앞장서서) 가주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대사께서 의심하는 곳에서 물어보십시오.”
“무엇이 쌍명(雙明: 쌍으로 밝다)이며, 또한 쌍암(雙暗: 쌍으로 어둡다)입니까?”
“동생역동사(同生亦同死: 같이 나고, 또한 같이 죽는다)입니다.”
초경스님이 당시에 감사의 예를 올리고 갔다.
只如招慶一日問羅山云, 巖頭道, 恁麼恁麼不恁麼不恁麼, 意旨如何. 羅山召云, 大師. 師應諾. 山云, 雙明亦雙暗. 慶禮謝而去, 三日後又問, 前日蒙和尚垂慈, 只是看不破. 山云, 盡情向爾道了也. 慶云, 和尚是把火行. 山云, 若恁麼據大師疑處問將來. 慶云, 如何是雙明亦雙暗. 山云, 同生亦同死, 慶當時禮謝而去.

후에 한 스님이 초경스님에게 물었다.
“같이 나고, 또한 같이 죽을 때는 어떠합니까?”
“개아가리를 닥쳐라.”
“대사께서도 입을 닥치고 공양이나 드십시오.”
後有僧問招慶, 同生亦同死時如何. 慶云, 合取狗口. 僧云, 大師收取口喫飯.

이 스님이 나산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벽암록 원본에는 ‘其僧卻來問羅山云, 同生不同死時如何. 山云, 如牛無角. 僧云, 同生亦同死時如何. 山云, 如虎戴角.’라고 적고 있는데, 오등전서, 오등회원, 대혜보각선사어록, 교외별전 등에 근거하여 바로 잡았다.

“같이 나고 같이 죽을 때는 어떻습니까?”
“소에게 뿔이 없는 것과 같다.”
“같이 났지만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호랑이가 뿔을 얹는 것과 같다.”
其僧卻問羅山, 同生亦同死時如何. 山曰如牛無角. 曰同生不同死時如何. 山曰如虎戴角.

말후구는 바로 이런 도리이다.
末後句, 正是這箇道理.

나산스님 회하의 한 스님이 이러한 (나산스님의) 뜻을 가지고 다시 초경스님에게 묻기에 이르렀는데, 초경스님이 말했다.
“피차가 다 안다. 무슨 까닭인가? 내가 만약 동승신주(東勝身洲: 사대주 가운데 동쪽 대륙) 동승신주: 사대주(四大洲) 가운데 하나이다. 사대주(四大洲)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서 보면,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으로, 일금산(七金山)과 대철위산(大鐵圍山) 사이의 염해(鹹海) 가운데에는 네 개의 대주(大洲: 큰 섬)가 있는데, 이것을 사대부주(四大部洲) 사대주(四大洲) 사천하(四天下) 수미사주(須彌四洲) 사주형량(四洲形量)이라고도 불렀다. 사대주는 곧 동승신주(東勝身洲) 남첨부주(南瞻部洲) 서우화주(西牛貨洲) 북구로주(北俱盧洲)이다. 동승신주(東勝身洲 -梵語; Purva-videha)를 예전에는 동불제바(東弗提婆) 동비제하(東毘提訶) 혹은 동불우체(東弗于逮)라고 불렀으며 약칭으로 승신(勝身 -梵語: Videha, 비제하(毘提訶))이라고 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매가 매우 빼어나서 승신(勝身)이라고 하였다. 그곳 지형은 마치 반달(半月)과 같았으며 사람들의 얼굴 또한 반달과도 같았다. 남첨부주(南瞻部洲 -梵語; Jamdu-dvipa)를 예전에는 남염부제(南閻浮提) 첨부(瞻部 -梵語; jambu)라고 불렀는데, 원래는 포도수(蒲桃樹)에서 음역한 것이다. 이 섬은 이 나무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형은 거상(車箱: 상자모양의 수레의 앉는 자리, 즉 직사각형)과 같았으며 사람들의 얼굴 또한 그러하였다. 서우화주(西牛貨洲 -梵語; Apara-godaniya)는 예전에는 서구야니(西瞿耶尼)였는데, 소를 이용해서 무역(貿易)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형은 만월(滿月)과 같았으며 사람들의 얼굴 또한 그러하였다. 북구로주(北俱盧洲 -梵語; Vttara-kuru)는 예전에는 북울단월(北鬱單越)이었다. 구로(俱盧)의 뜻은 승처(勝處: 빼어난 곳)를 의미한다. 지형이 위에서 서술한 세 개의 섬보다 빼어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형은 정방(正方: 정사각형)하며 마치 지소(池沼: 못과 소)와 같다. 사람들의 얼굴 또한 그러하다. 사대주(四大洲)에는 각각 특별한 일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남첨부주(南膽部洲)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용맹하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일을 훌륭하게 처리했으며 범행(梵行)을 잘 닦았다. 부처가 이 땅에서 나왔다. 이것은 다른 세 개의 섬과 모든 하늘보다 뛰어나다. 동승신주(東勝身洲)는 땅이 지극히 넓고 크며 지극히 묘하였다. 서우화주(西牛貨洲)는 소(牛)가 많고 양(羊)이 많고 주옥(珠玉)이 많았다. 북구로주(北俱盧洲)는 속박하는 바(所繫屬)가 없었으며 내 것(我所)을 두지 않았으며 수명이 천세(千歲)에 이르렀다.
에서 한 마디 하면 서구야니주(西瞿耶尼洲: 사대주 가운데 서쪽 대륙)에서도 알고, 천상에서 한 마디 하면 인간(계)에서도 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알고 눈과 눈이 서로 비춘다.”
羅山會下有僧, 便用這箇意, 致問招慶. 慶云, 彼此皆知, 何故我若東勝身洲道一句, 西瞿耶尼洲也知, 天上道一句, 人間也知. 心心相知, 眼眼相照.

“같은 가지에서 남은 오히려 보기 쉽지만, 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음은 오히려 특별하다.”
석가달마라도 모색하지 못한다. 장경각 번역: “같은 가지에서 났다”는 것은 그래도 알기 쉽지만, “죽음은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으니, 석가와 달마가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同條生也則猶易見, 不同條死也還殊絕, 釋迦達磨也摸索不著.

“남북동서에서 귀거래(歸去來: 돌아가다)해서는” 장경각 번역: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

조금은 좋은 경계이다.
“깊은 밤 함께 일천 산봉우리의 눈을 본다.”
자 말해보라, 이것은 쌍으로 밝음인가? 쌍으로 어두움인가? 같은 가지에서 난 것인가? 같은 가지에서 죽은 것인가?
눈을 갖춘 납승이라면 시험 삼아 (질그릇을 감별하듯) 감별해보라. 얼굴을 드러내도 오히려 알지 못한다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면 더욱 알기 어렵다.어찌 감히 말후구이리오.지금 사해(四海)에까지 의심이 이르렀다. (보녕 용)露面出來猶不識, 低頭歸去更難知.那堪末後一句子, 直到于今四海疑. (保寧勇)쌍으로 밝고 다시 쌍으로 어둠이여홀로 서서 수방(殊方: 타지)을 끊는다.기틀을 타고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보았어도어찌 저 기봉을 마주하리오.같은 가지에서 나옴이여두 거울이 서로 비춤은 능히 이름붙이지 못한다.같은 가지에서 죽지 않음이여무쇠나무에서 꽃이 피면 고금에 (향기가) 뻗친다.말후구에 비로소 우관(牢關)에 이름이여문 앞에는 대안산(大案山)이다. (원오 근)雙明復雙暗, 獨立絕殊方. 乘機覿面提, 其鋒安可當.同條生, 兩鏡相照無能名. 不同條死, 鐵樹花開[一/旦]今古.末後句始到牢關, 拈卻門前大案山. (圓悟勤)


南北東西歸去來, 有些子好境界. 夜深同看千巖雪. 且道是雙明雙暗, 是同條生是同條死, 具眼衲僧試甄別看.

출판까지의 이모저모...

불교를 공부하는데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만한 복이 없다면 홀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걸음걸음 저 미지를 향하여 오직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따라서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벽암록]을 펼쳤으나 오역의 문제는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게 되었다. 이 오역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한자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둘째는 제대로 볼 수 있는 공부의 안목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불교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오역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처음 번역을 마치고 다시 다섯 차례 수정작업을 하면서 절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세 가지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다시 살펴도 이 3%의 미진함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화두를 참구하고, 옛 선사들의 게송과 구절을 번역하기를 A4 용지로 1만5천 쪽에 이르고, 다시 교학의 글을 펼치고서 역시 1만5천 쪽 이상에 달하는 불교용어를 정리해보게 되었다.

교학으로 처음 접한 것은 바로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이장의]였다. 그리고 화엄종 두순화상의 [화엄법계현경], 세친보살의 [구사론], [섭대승론석] 등을 열람하게 되었다. 이후로 소승과 대승의 여러 경전을 3년 동안 살펴보다가 문득 하나의 책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으로 가는 불교통론]이다. 이 책은 비록 개론서에 지나지 않지만, 번뇌가 무엇이고 삼승은 이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 책은 이미 전국의 사찰에 인연 따라 법보시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작업을 어느 정도 마쳤을 때, 비로소 [벽암록] 8차 수정작업을 시작하여서 마침내 탈고를 하게 되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일이 이제야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제: 벽암록 탁마]라는 글이 이루어졌다.

이 한 권의 책이 모든 수행자들에게 언제나 함께 하는 좋은 벗이 되어주고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취산 합장

출판사: 법고소리
분량: epub, 1325쪽 10pt

작가정보

저자(글) 설두중현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선사: 북송시대의 하북(河北)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이(李)씨다. 호는 상통(常通) 또는 항통(恒通)이다. 명주 설두중현선사: 지문광조(智門光祚)선사의 법을 이었다. 대감(大鑑: 혜능) 이하 제10세에 익주(益州) 보안원(普安院) 인선(仁詵)스님을 따라서 출가하였다. 후에 지문광조선사를 참례하고서 법을 얻었다. 오문(吳門)의 동정(洞庭)에 머물다가 사명(四明)의 설두산으로 옮겼다. 낭야혜각(瑯邪慧覺)과 함께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칭하였으며 입적한 후에는 인종황제가 ‘명각(明覺)선사’라는 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동정어록』, 『설두개당록』, 『폭천집』, 『조영집』, 『송고집』, 『염고집』, 『설두후록』등이 있다. 법은 천의의회(天衣義懷), 보본유란(報本有蘭) 등 6인에게 전하였다.

저자(글) 원오극근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는 원오극근불과(圓悟克勤佛果: 1063 ~ 1135)선사는 오조법연선사의 법을 이었다. 제자로는 대혜종고선사 등이 있다.
설두선사가 게송을 붙인 <벽암록>에 다시 평창을 붙여 구절을 자세히 드러내어 후학을 위해 종지(宗旨)를 밝혔다.

취산원장:
해인사로 출가하여 30년간 지관을 닦고 화두를 참구하다.
화두를 참구하는 가운데 문득 물소리를 듣고서 다시는 옛 사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십만송의 게송을 일시에 듣는 것과 같았다.
이후로 경전과 선어록을 더욱 살피고 살피다.
『벽암록』, 『금강경백가해』, 『육조단경』,『화두100칙 염송집』,『선으로 가는 불교통론』, 『미조록』,『임제록』,『조주록』등을 번역하고 찬술하고 저술하다.
현재 충북단양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을 말하다.
✉eMail: taoindr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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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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