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대전쟁사 제6책
2023년 12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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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86009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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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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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대전쟁사》총 18책에는 중국의 역대 병란이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으나 한족(漢族) 및 북방민족과의 부단한 군사적 갈등을 겪으면서 국체를 보존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도 함께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제6권의 제九장 ‘한(漢) 무제(武帝)의 조선(朝鮮) 평정’, 제11권의 제五장 ‘수(隋)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 제12권의 제七장 ‘당(唐) 초기의 대외전쟁(三): 고구려 및 백제 정벌’ 및 제八장 ‘무후(武后)의 천정(擅政)과 대내외 전역’ 등은 우리 민족사와 직결되어 있어 우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간취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편집위원 중 상당수가 한국학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내에는 본서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분량이 방대하고 병란이 중심이 된 관계로 설령 한문에 밝은 인사라고 해도 전문 분야인 군사를 잘 모른다는 점에서 역본의 출현은 난망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에 역자인 민경길 박사가 한자문화권 밖의 언어로는 세계 최초로 본서 18책 전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은 우리 출판문화사에 일대 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역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종신하여 전쟁사와 군사학에 밝을 뿐 아니라 한자 고문과 현대중국어, 영어와 독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해 이미 서양병법사의 전범(典範)으로 평가되어 온 독일 한스 델브뤽(Hans Delbrueck)의 《Geschichte der Kriegskunst-in Rahmender politischen Geschichte》를 미국의 영어판 및 구소련의 러시아어판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한글 번역본을 출간한 바 있으며, 그 밖에도 《손자병법주해》, 《북한산》, 《한국과 중국의 궁술》등을 저술한 자강(自彊)의 실력자입니다.
실제로 역자는 《중국역대전쟁사》를 단순히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처에 역주를 가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곧 우리 민족과의 관계에서 지나친 중화의식이 투영된 곳이나 역사왜곡이 자행된 곳, 앞뒤가 모순되거나 사실관계가 잘못 된 곳들도 일일이 사적을 뒤져 바로잡았습니다. 이는 동양사 일반과 군사 분야에 해박한 역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번역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본 번역본의 의의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면,
첫째,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수천 년 정치 역학적 관계를 전쟁사를 중심으로 통사적(統史的)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점, 둘째, 한자 문화권의 군사 사상과 전략(戰略) 및 전술(戰術)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제공된 점, 셋째, 아시아의 정치 역학적 구도하에 ‘국가방위 전략’ 및 ‘한반도 통일 전략’ 수립의 역사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에 더해 미중 간의 경제 군사적 갈등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추구로 인한 불안정한 주변 국제 정세를 감안할 때 이 번역본의 출판 필요성은 더욱 증대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 전집의 번역물은 그 심대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출판시장의 열악한 사정상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몇몇 출판사가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785매에 이르는 부도(附圖)와 결정적으로는 막대한 제작비 문제로 출판이 무산되어 왔습니다.
이러던 차에 한미친선군민협의회 박정기 회장의 일부 재정지원으로 도서출판 문무사가 대만 저자권사와 저작물 한국내 출판권 계약이 성사되었고, 문무사 대표도 상업성을 떠난 일종의 사명감으로 문화사업 차원에서 우선 전자책으로 18책을 제작하게 되었고 독자의 반응과 예산이 확보되면 차후 종이책을 만들 예정입니다.
덧붙이면, 역자가 본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2010년으로 본 번역물은 10년 적공의 결과물입니다. 이는 국가나 사회가 응당 나서야 할 일에 순전히 개인적인 노력을 쏟아 부은 것으로 역자의 작업은 우리 출판문화 창달을 촉진하는 선도적 업적으로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10년 적공의 결과물이 출판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장된다면, 이는 역자 개인의 노고가 무위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출판문화의 엄청난 손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역자의 번역에 10여 년, 전자책 편집에도 2년이 소요되었습니다.
권두언 … 3
역자 서문 … 5
제十권 남북조(南北朝) 시대
제一장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전반적 정세 … 13
제一절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전반적 모습 … 13
제二절 남북조의 정치, 경제, 사회 및 학술사상 … 36
제三절 남북조의 군비(軍備), 군제(軍制) 및 전략(戰略), 전술(戰術) … 53
제二장 유유(劉裕)의 후진(後秦) 격멸과 동진(東晋) 제위(帝位) 찬탈(簒奪) … 71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와 전쟁의 계기 … 71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地理)와 작전계획 … 80
제三절 유유(劉裕)의 후진(後秦) 격멸작전 경과 … 87
제四절 전후(戰後)의 상황: 유송(劉宋)의 찬탈(簒奪) … 113
제五절 평가 … 125
부도 215. 유유(劉裕)의 후진(後秦) 격멸 이전 각국의 일반정세 … 740
부도 216. 주영석(朱齡石)의 촉(蜀) 정벌작전 경과 … 742
부도 217. 유유(劉裕)의 후진(後秦) 격멸작전 경과 … 744
부도 218. 하왕(夏王) 혁연발발(赫然勃勃)의 장안(長安) 점령 경과 … 746
제三장 탁발위(拓跋魏)의 북방(北方) 통일 전쟁 … 132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 … 132
제二절 북위(北魏)의 북방(北方) 통일 전역의 중요 인물 … 152
제三절 전장(戰場)의 지리 … 156
제四절 전쟁계획 … 159
제五절 작전경과 … 161
제六절 전후(戰後)의 상황 … 186
제七절 평가 … 186
부도 219. 탁발위(拓跋魏)의 북방(北方) 통일 이전의 일반정세 … 748
부도 220. 북위(北魏)의 하(夏) 격멸전 경과(一) … 750
부도 221. 북위(北魏)의 하(夏) 격멸전 경과(二) … 752
① 하(夏)의 장안(長安) 수복
② 북위(北魏)의 재진격과 하(夏) 격멸
부도 222. 북위(北魏)의 연(燕) 격멸전 경과 … 754
부도 223. 북위(北魏)의 유연(柔然) 북벌 경과 … 756
제四장 남북조(南北朝) 전쟁(一): 유송(劉宋)의 북벌(北伐) … 192
제一절 전쟁 전의 일반상황과 전쟁의 계기 … 192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193
제三절 작전경과 … 198
제四절 전후의 상황 및 평가 … 208
부도 219. 탁발위(拓跋魏)의 북방(北方) 통일 이전의 일반정세 … 748
부도 224. 유송(劉宋)의 븍벌전 경과 … 758
제五장 남북조(南北朝) 전쟁(二): 북위(北魏)와 유송(劉宋)의 공방전 … 210
제一절 전쟁 전의 일반상황과 전쟁의 계기 … 210
제二절 북위(北魏)의 정정(政情)과 국세(國勢) … 214
제三절 유송(劉宋)의 정정(政情)과 국세(國勢) … 220
제四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225
제五절 북위(北魏)와 유송(劉宋) 간 공방전의 작전경과 … 232
제六절 전후(戰後)의 상황 … 262
제七절 평가 … 267
부도 225. 북위(北魏)와 유송(劉宋) 간 공방전 이전의 일반상황과 전쟁의 계기 … 760
부도 226. 북위(北魏)의 유송(劉宋) 재정벌 작전경과 … 762
부도 227. 유송(劉宋)의 북벌 작전경과 … 764
부도 228. 북위(北魏)의 반격 작전경과 … 766
제六장 유송(劉宋)의 내전(內戰)과 멸망 … 270
제一절 내전 이전의 일반정세 … 271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281
제三절 유송(劉宋) 효무제(孝武帝)의 유의선(劉義宣) 평정 및 명제(明帝)의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 토벌 … 288
제四절 소도성(蕭道成)의 2차에 걸친 내란 평정 … 318
제五절 전후(戰後)의 상황 … 327
제六절 평가 … 340
부도 225. 북위(北魏)와 유송(劉宋) 간 공방전 이전의 일반상황과 전쟁의 계기 … 760
부도 229. 유송(劉宋) 명제(明帝)의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 토벌전 작전경과 … 768
부도 230. ⓵ 유송(劉宋)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의 건강(建康) 진격 작전경과 … 770
⓶ 유송(劉宋)의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 평정 작전경과 … 770
⓷ 유송(劉宋)의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 평정 작전경과 … 770
제七장 남북조(南北朝) 전쟁(三): 북위(北魏)의 소제(蕭齊) 토벌전 … 349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와 전쟁의 계기 … 349
제二절 소제(蕭齊)의 정정(政情)과 국세(國勢) … 351
제三절 북위(北魏)의 정정(政情)과 국세(國勢) … 355
제四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359
제五절 북위(北魏)의 제2차 소제(蕭齊) 토벌 … 361
제六절 북위(北魏)의 제3차 소제(蕭齊) 토벌 … 375
제七절 전후(戰後)의 상황 … 384
제八절 평가 … 395
부도 231. 북위(北魏)의 제2차 소제(蕭齊) 토벌 전의 일반정세 … 772
부도 232. 북위(北魏)의 제2차 소제(蕭齊) 토벌 작전경과 … 774
부도 233. 북위(北魏)의 제3차 소제(蕭齊) 토벌 작전경과 … 776
제八장 남북조(南北朝) 전쟁(四): 북위(北魏)의 소량(蕭梁) 토벌전 … 399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와 전쟁의 계기 … 399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419
제三절 북위(北魏)의 소량(蕭梁) 남벌전(南伐戰) … 423
제四절 소량(蕭梁)과 북위(北魏)의 전쟁 재발 … 430
제五절 소량(蕭梁)과 북위(北魏)의 제3차 교전: 구산전(朐山戰), 수양전(壽陽
戰) 및 익주전(益州戰) … 447
제六절 전후(戰後)의 상황 … 456
제七절 평가 … 461
부도 234.북위(北魏)의 소량(蕭梁) 남벌전(南伐戰) 전의 일반정세 … 778
부도 235. 소연(蕭衍)의 소제(蕭齊) 찬탈 작전경과 … 780
부도 236. 북위(北魏)의 소량(蕭梁) 남벌전 작전경과 … 782
부도 237. 소량(蕭梁)과 북위(北魏)의 제2차 교전 당시 서부전장(西部戰場) 작전경과 … 784
부도 238. 소량(蕭梁)과 북위(北魏)의 제2차 교전 당시 동부전장(東部 戰場) 작전경과 … 786
① 전반적인 경과
② 종리회전(鍾離會戰)
③ 의양회전(義陽會戰)
부도 239. 소량(蕭梁)과 북위(北魏)의제3차 교전 작전경과〔구산전(朐山戰) 및 수양전(壽陽戰)〕 … 788
제九장 북위(北魏) 말기의 내란(內亂) 전역 … 465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와 내란(內亂)의 계기 … 466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468
제三절 육진(六鎭)의 반란 … 474
제四절 관서(關西)의 반란 … 479
제五절 하북(河北)의 반란: 유주(幽州), 기주(冀州), 상주(相州) … 487
제六절 이주씨(爾朱氏)의 변란(變亂) … 493
제七절 고환(高歡)의 이주씨(爾朱氏) 토벌 … 511
제八절 북위(北魏)의 내란 중 소량(蕭梁)의 북벌(北伐) … 525
제九절 평가 … 539
부도 240. 파육한발릉(破六韓拔陵)의 반란 경과 … 790
부도 241. 북위(北魏)의 관서(關西) 반란 경과 … 792
부도 242. 이주영(爾朱榮)의 낙양(洛陽) 진입과 갈영(葛榮) 및 만사추노(万俟醜奴) 토벌 경과 … 794
부도 243. 고환(高歡)의 이주씨(爾朱氏) 토벌 및 진양(晉陽) 습격 경과 … 796
부도 244. 북위(北魏)의 내란 중 소량(蕭梁)의 북벌(北伐) 및 낙양(洛陽) 반격(反擊) 경과 … 798
제十장 동위(東魏)와 서위(西魏)의 전쟁 … 545
제一절 전쟁 전의 일반정세와 전쟁의 계기 … 545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561
제三절 쌍방의 전쟁 준비 … 566
제四절 작전경과 … 572
제五절 전후(戰後)의 상황 … 591
제六절 평가 … 597
부도 245.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전쟁 전의 일반정세 … 800
부도 246. 고환(高歡)의 서위(西魏) 공격 작전경과 … 802
① 동관전(潼關戰)
② 위곡회전(渭曲會戰)〔사원회전(沙苑會戰)〕
부도 247. 우문태(宇文泰)의 반격과 제1차 망산회전(邙山會戰) 작전경과 … 804
부도 248. 동위(東魏)와 서위(西魏)의 제2차 망산회전(邙山會戰) 작전경과 … 806
제十一장 소량(蕭梁) 후경(侯景)의 난(亂) … 601
제一절 전쟁 이전 일반정세와 난(亂)의 계기 … 602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와 작전계획 … 609
제三절 후경(侯景)의 건강(建康) 격파 … 611
제四절 왕승변(王僧辯)과 진패선(陳覇先)의 후경(侯景) 토벌전 … 626
제五절 전후(戰後)의 상황 … 645
제六절 평가 … 666
부도 245.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전쟁 전의 일반정세 … 800
부도 246. 고환(高歡)의 서위(西魏) 공격 작전경과 … 802
① 동관전(潼關戰)
② 위곡회전(渭曲會戰)〔사원회전(沙苑會戰)〕
부도 247. 우문태(宇文泰)의 반격과 제1차 망산회전(邙山會戰) 작전경과 … 804
부도 248. 동위(東魏)와 서위(西魏)의 제2차 망산회전(邙山會戰) 작전경과 … 806
부도 249. 후경(侯景)의 건강(建康) 격파전 경과, 건강(建康) 부근 회전의 경과 … 808
부도 250. 왕승변(王僧辯)과 진패선(陳覇先)의 후경(侯景) 토벌전 경과 … 810
부도 251.제군(齊軍)의 건강(建康) 진공작전 경과 … 812
제十二장 북주(北周)의 중원(中原) 통일: 북제(北齊) 격멸전 … 671
제一절 전쟁 이전의 일반정세와 전쟁의 계기 … 671
제二절 전장(戰場)의 지리 및 전쟁계획 … 682
제三절 작전경과 … 687
제四절 전후의 정세: 북주 무제의 남벌 (南伐), 북정(北征) … 728
제五절 평가 … 733
부도 252. 북주(北周)의 북제(北齊) 격멸전 전의 일반정세 … 814
부도 253. 북주(北周)의 제1단계 북제(北齊) 북벌전 경과 … 816
① 진양전(晉陽戰) 및 낙양전(洛陽戰)
② 의양전(宜陽戰) 및 분북전(汾北戰)
부도 254. 진(陳)의 회남(淮南) 및 회북(淮北) 공격 경과 … 818
부도 255. 북주(北周)의 2단계 1차 북제(北齊) 북벌전 경과와 2차 북제(北齊) 북벌전 경과〔평양전(平陽戰)〕 … 820
부도 256. 북주(北周)의 2단계 2차 북제(北齊) 북벌전 경과〔평양전(平陽戰), 진양전(晉陽戰), 업전(鄴戰)〕 … 822
▮부도(附圖)-(총 42매) … 739
2. 남조(南朝)의 흥망(興亡)
유송(劉宋): 유유(劉裕)의 선조는 팽성(彭城)에 살다 동진(東晋) 초기 경구(京口)〔현 강소성 진강현(鎭江縣)〕로 옮겨 살았다. 유유는 재능과 꾀가 많았고 특히 용병에도 기모(奇謀)가 많아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이길 수 있었다. 동진은 말기에 효무제(孝武帝)와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가 불교와 술과 사치에 빠져 깨어있을 때보다 취해있을 때가 많고 측근 승려들이 국정에 관여하자 정치가 말할 수 없이 문란해졌고 효무제는 결국 술에 취해 있다 장귀인(張貴人)에게 살해되고 아들 사마덕종(司馬德宗)이 즉위하니 안제(安帝)였다. 사마덕종은 타고난 천치(天痴)로 말도 못하고 추위와 더위는 물론 배고픈 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 모든 권력은 사마도자와 그 아들 사마원현(司馬元顯)의 수중에 들어갔다. 융안(隆安) 초년〔서기 397년〕 왕공(王恭)의 변(變)과 손은(孫恩)의 난(亂)이 있었고, 원흥(元興) 연간〔서기 402년〜404년〕 환현(桓玄)이 이를 틈타 건강을 격파하고 칭제하고 국호를 대초(大楚)라 하면서 진(晉)의 국통(國統)은 사실상 끊어졌다. 당시 유유가 강인한 북부병(北府兵)의 일원으로 유뢰지(劉牢之)를 따라 손은(孫恩)을 평정하면서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날린 후 다시 환현에 이어 촉(蜀)의 초종(譙縱)까지 평정하고 군정(軍政)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어 유유는 남연(南燕)과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청(靑), 서(徐), 연(兗), 예(豫), 사(司), 옹(雍) 6개 주(州)를 수복함으로써 동진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늘인 후 20여 년 동안 동진 제실(帝室)을 유지하다가 공제(恭帝) 원희(元熙) 2년〔북위 명원제(明元帝)태상(泰常) 5년. 서기 420년〕 공제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았으니 유송(劉宋) 무제(武帝)였고, 국호(國號)를 송(宋)〔유송(劉宋)〕으로 했다. 무제는 늙은 나이에 제위(帝位)에 올라 곧 죽고 아들 유의부(劉義符)가 뒤를 이으니 소제(少帝)였다. 소제는 덕(德)이 없었고 무제 상중(喪中)에 북위(北魏)가 남벌(南伐)을 나왔다. 이때 국정을 보좌하던 대신(大臣)들인 서이지(徐羡之), 부량(傅亮), 사회(謝晦) 등은 외환(外患)은 다가오고 소제의 악행은 심해지자 소제를 죽이고 유의륭(劉義隆)을 세우니 문제(文帝)였다. 문제는 과감하고 용단이 있어 많은 유능한 인재들의 보좌하에 30년 재위(在位) 기간 중 정치를 일신했다. 역사에서는 이때를 원가지정(元嘉之政)이라 부른다.
유씨(劉氏)의 송(宋) 왕조는 세족(世族)들을 눌러 권신(權臣)들의 발호를 방지했고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을 이루려 한 결과 흉포한 소년 군주가 특히 많았다. 무제 다음의 소제(少帝) 유의부(劉義符), 문제(文帝) 이후 태자 유소(劉劭)의 시역(弑逆), 효무제(孝武帝) 다음 전폐제(前廢帝) 유자업(劉子業), 명제(明帝) 다음의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이 그런 예이다.〔뒤의 제계(帝系) 참고.〕 8인 황제 중 4인이 흉포한 소년 군주였고 이런 폭군이 나오면 반드시 폐립이 뒤따랐고 폐립 다음에는 반드시 전쟁과 잔혹한 참살이 뒤따랐다. 이런 정국 변화에 따라 국력은 소모되고 인재들은 사라지고 법률과 기강은 파괴되는 악순환이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효무제와 명제도 국가를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매우 잔혹했다. 효무제는 문재(文才)는 뛰어났지만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각박해 살육(殺戮)이 많았고, 빈번한 궁궐 수축으로 부고(府庫)를 탕진했고, 후첩(后妾)들의 무례로 인해 남군왕(南郡王) 유의선(劉義宣)의 난(亂)을 초래했고,〔효건(孝建) 원년〕 종실(宗室) 왕(王)들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의 난(亂)을 초래했고, 권력이 신하에게 돌아가는 것을 싫어해서 총록상서(總錄尙書)〔재상〕 직을 폐지했고, 전조(銓曹)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싫어해서 2인의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두었다. 효무제는 말년에는 재물 탐욕까지 생겨 녹봉 2척 석 자사(刺史)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반드시 큰 재물을 바치게 했고 노름판을 벌여 재물을 다 빼앗은 후에야 그치기도 했다. 명제(明帝) 역시 문학(文學)을 장려했지만 즉위 후에는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과 국권(國權)을 다투다 결국 전면적 내전(內戰)을 일으켜 2년에 걸쳐 큰 손실을 입은 후 성질이 잔인하게 변해서 측근이라도 실언(失言)하는 자가 있으면 느닷없이 죽였다. 이에 많은 종실 왕(王)들이 유자훈 측에 붙자 명제는 이들을 더 잔인하게 대했다. 효무제에게 아들이 28명이 있었지만 명제는 이들을 거의 다 죽였고, 또 사치가 심해서 이때부터 유씨(劉氏)의 송(宋)은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해서 후폐제(後廢帝) 즉위 후 순식간에 나라가 망하고 말했다. 유씨의 송(宋)은 4세(世), 8제(帝)를 거쳐 60년 만에 멸망했다.
본서의 서지학적 정보와 중심 내용을 원서의 발간사 등을 참조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본서의 편찬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수천 년 중국의 역대 건국 시정(施政) 및 중요 국방 군사 계획 내지 흥망과 전쟁의 사례들을 종합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옛 인물들의 시련 극복과 치란(治亂) 및 흥망의 이치를 명확히 밝혀 후대인들의 교훈이 되게 한다.
(2) 역대 중국의 건국과 건군, 제도와 학술, 내정과 외교 내지 전쟁책략의 경험과 교훈을 밝혀 후대인들이 지혜를 계발(啓發)하고 국가운영, 작전지도 및 군사운용의 기초로 삼게 한다.
2. 본서의 범위는 황제(皇帝) 시기부터 청대(淸代) 태평천국까지이며, 전후 4천6백여 년에 걸친 중국역사 전부가 포함되었고, 각 시대를 1개 편(編)으로 총 7개 편(編)으로 구성했다. 각 편은 시대 구분에 따라 몇 개 권(卷)으로 구성했고, 각 권(卷) 역시 중요 시대 혹은 왕조를 기준으로 몇 개 장(章)으로 구성했다. 각 시대별로는 우선 지리, 정치정세, 사회상황, 국방태세, 외교정책과 책략 결정, 전략과 전술 운용, 주요 인물의 영향 등 전반적 내용을 대략 설명하고 이로부터 그 시대의 전반적 정세 및 성쇠(盛衰)와 득실(得失)을 명확히 했다. 둘째, 각 시대의 중요 전역(戰役)과 회전(會戰)에 대해 시대별로 장(章)을 나누어 서술했는데, 우선 해당 전역이나 회전 전의 일반적 형세, 발생원인, 전장(戰場)의 지리 등을 살펴본 후 쌍방의 전략 지도(指導), 작전경과, 전략 전술의 운용 및 득실, 전후(戰後) 정세 등을 다루었고, 마지막에 해당 전역과 회전을 종합 평가한 절(節)을 두어 그 성패(成敗)를 검토하고 또한 전쟁의 원리와 원칙을 인용해 이를 입증했고, 이를 통해 해당 전쟁사의 교훈을 이끌어내고 전쟁 지도의 지혜를 적시(摘示)했다. 동양 용병사상의 대표로 평가되며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손자병법》은 곧 춘추시대의 용병에 대한 종합적 결론으로, 《손자병법》에서 말한 모든 용병 원칙과 법칙들은 모두 실전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손자병법》을 기초로 각 전역에 대해 종합 평가를 내리고 있다.
3. 각 시대의 정치, 군사를 중심으로 그 시대의 경제, 문화 및 민족이 처해 있던 환경 등 여타 군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던 요소들을 취합 편찬해서 독자들이 당시 흥망성쇠의 원인을 분명히 알고 거울삼을 수 있게 했다.
4. 각 편, 각 권의 제一장에 서술된 ‘일반정세’는 해당 시대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설명한 것으로 우선 시대 형성의 특징과 전개 과정을 서술해 각 권 본문에 대한 안내 역할을 하게 했고 아울러 그 시대의 개황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했다.
5. 각 시대 중심인물들의 사상, 도덕, 재능, 지략, 포부, 인품, 일처리 등에 관한 개인적 전기(傳記)를 만들어 그들의 국가경영 및 정치군사의 계획과 체계를 소상히 소개했다.
6. 사료(史料) 수집에 있어 진실 탐구에 노력했고, 현대적 시각과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로 인물과 사건에 관한 기록에 접근함으로써 개인적 편견에 빠지거나, 사실(史實)을 왜곡하거나, 옛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힘썼다.
역자는 한문본《중국역대전쟁사》를 번역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거나 모순된 부분, 혹은 중화의식이 과도하게 표출된 대목 등에 대해 주석을 가해 바로잡았습니다. 덕분에 본 번역본 《중국역대전쟁사》의 학술적 가치는 크게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몇 군데 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 고유명사 또는 중요한 어휘로서 난해한 원문을 그대로 소개할 수밖에 없을 경우
-원문: ‘成康文景之治’
번역문: ‘성강문경(成康文景)의 치세(治世)’
[역자 주: ‘성강(成康)의 치세’는 서주(西周)가 가장 안정되고 강성했던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재위기간을 말하며, ‘문경(文景)의 치세’는 서한(西漢)이 가장 강성했던 무제(武帝) 시대의 기초를 확립한 문제(文帝), 경제(景帝)의 재위기간을 말한다.]
-원문: ‘交趾’
번역문: 교지(交趾)
[역자 주: 현 베트남 북부 홍하(紅河) 삼각주 유역. 당대(唐代)까지 중국 군(郡)이었지만 이후 독립했고, 송(宋)은 그 통치자를 교지군왕(交趾郡王)에 봉했다.]
-원문: ‘侈靡論’
번역문: 치미론(侈靡論)
[역자 주: 일종의 고대 경제이론으로 대량소비가 대량생산을 촉진시켜 사회경제 번영을 가져온다는 주장. 《관자(管子)》, 치미(侈靡) 편 참고]
원문: ‘三朝北盟會編’
번역문:《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역자 주: 《삼조북맹회편》은 송(宋)의 서몽신(徐梦莘)이 송(宋) 휘종, 흠종, 고종 3대에 걸쳐 있었던 송(宋)과 금(金) 간 화전(和戰)에 관한 다방면의 사료를 수집해 놓은 글]
2.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부분
(1)원문(번역): 《후한서(後漢書)》, 권115 동이전(東夷傳)에서는 구이(九夷)를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百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및 양이(陽夷)”라고 했다.
[역자 주:《논어정의(論語正義)》 등에는 구이의 명칭이 현도(玄莬), 낙랑(樂浪), 고려(高麗), 만식(滿飾), 부유(鳧臾), 소가(素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 등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 외에도 우이(嵎夷), 화이(和夷). 도이(島夷), 회이(淮夷), 서이(徐夷), 주이(邾夷), 개이(介夷), 거이(莒夷), 기이(杞夷), 내이(萊夷), 패이(郥夷), 여이(黎夷), 관이(串夷) 등의 구분도 있다.〕
(2) 원문(번역): 第6券 第九章 제三절 한무제의 조선(朝鮮) 정벌 전쟁
[역자 주: 앞서 제一장, 제二절에서 소개했듯이 정인보 선생은 한(漢) 무제 당시 예맥조선의 항복 기록에 대해 한(漢)의 사서(史書)가 패배를 승리로 날조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의심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제三절의 내용은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대표적 역사 왜곡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이를 중국 사서(史書)의 왜곡 기록 문제로 보는 경우도 있고, 기록에 대한 해석의 왜곡 문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조선 정벌군을 이끈 순체(荀彘), 공손수(公孫遂), 위산(衛山)의 처형과 양복(楊僕)의 폐서인(廢庶人)에 관한 이해가 어려운 기록이 있다. 또 사마천은 당대 역사가로 시대의 목격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漢) 무제의 여타 정벌전 때와는 달리 조선 정벌에 대해서는 정벌 후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만 기록했을 뿐 사군(四郡)의 이름들은 언급이 없다. 사군(四郡)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2백 년 후 동한(東漢)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이다. 허나 같은 《한서》에서도 지리지(地理志)는 무제가 조선에 설치한 군(郡)을 현도와 낙랑만 언급했고, 또 오행지(五行志)는 조선을 정벌 후 삼군(三郡)을 설치했다 한다. 이런 점 등을 근거로 우리 재야 사학자들은 중국 사서(史書)가 패배를 승리로 날조했다고 본다. 한편,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상의 사군(四郡)을 한반도 일대에 있었다고 보기 시작한 것은 중국 역사가들이 아니라 조선시대 문인(文人)들이며 이를 확고한 일반론으로 정립시킨 것은 일제 강점기 전후의 일본 사학자들이다. 이 때문에 재야 사학자들은 중국 사서(史書)에 기록된 사군(四郡) 관련 지명(地名)들의 재해석을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국내에 수많은 논문들이 있으니 반드시 함께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3) 원문(번역): 전체 아시아의 패주(覇主)를 위한 원책(遠策):
당(唐) 태종의 고구려 동정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 중에도 이를 “사출무명(師出無名)”〈명분 없는 출정〉 또는 “궁병독무(窮兵黷武)”〈이유 없는 호전적인 용병(用兵)〉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과거 진부한 유학(儒學) 사상이나 방현령(方玄齡)이 죽음에 임박해서 올렸던 상소문의 영향을 받은 것 같고 중국민족 생존발전의 투쟁사와 당시 정치형세를 간과한 것이다. 옛 역사가들은 진(秦) 시황이 장성(長城)을 쌓고 군대를 일으켜 흉노에 대비했던 것이나 한(漢) 무제가 수십 년에 걸쳐 흉노를 정벌한 것도 역시 “궁병독무(窮兵黷武)”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국가민족의 안위와 이민족과의 투쟁 상황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 흉노의 세력은 최고조에 달해 진(秦) 시황은 중국을 통일 후 흉노의 남하 위협이 매우 엄중했으므로 북방 국방을 공고히 하려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키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북방을 지키게 했었는데 이는 모두 국가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가 죽자 진(秦)은 곧 붕궤되고 중국은 여러 해 동안 내란상태에 빠졌으며 강대한 흉노가 남침을 시작해 장성을 부수고 음산(陰山) 산맥을 넘어 상건하(桑乾河) 유역에서 내몽골 이극소맹(伊克昭孟)을 건너 하남 땅으로 들어와 그곳을 모두 유목민족의 생식지(生息地)로 만들었다. 중국의 역사와 국방 지리에 대해 조금만 알면 이런 정세가 중국의 국가와 민족을 위협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한(漢) 고조도 중국 재통일 무렵 “평성(平城)의 포위”를 당했고 그 이후 문제(文帝), 경제(景帝) 역시 수십 년에 걸쳐 치욕의 세월을 보냈는데 한편으로는 딸들과 옥백(玉帛)을 바쳐 흉노 침입을 늦추어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북방 국방을 충실히 해가면서 중국의 국력을 나날이 강화했었고 무제에 이르러 비로소 흉노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이때 일에 대해서는 앞의 제四권, 제六권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이는 4대에 걸쳐 수십 년간 중단 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를 어찌 “궁병독무(窮兵黷武)”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서진(西晉) 팔왕(八王)의 난(亂) 이후를 돌아보면 오호(五胡)가 번갈아 침입해서 국가는 망했고 결국 선비(鮮卑)가 중국의 주인이 되어 중국이 2백여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다. 수(隋) 문제(文帝), 양제(煬帝) 부자(父子)에 의한 중국 재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중국이 주인이 되는 정책을 폈는데 그때까지 2백여 년 세월을 잠시라도 돌아본다면 어찌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당(唐) 고조 이연(李淵) 부자가 군사를 일으킬 때만 해도 중원(中原)의 기병(起兵) 세력들은 돌궐에 신하를 자처하며 기대지 않은 자가 없던 때로서 그래야 생존 발전할 수 있었고 이연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가 통일대업을 이룰 때쯤에도 돌궐이 8차에 걸쳐 대거 침입해서 통일을 방해했다. 이연 부자도 이런 고통을 체험했는데 중국의 생사 존망에 대한 돌궐의 위협에 누가 놀라지 않으랴?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당 태종의 돌궐 정벌은 진(秦) 시황(始皇)과 한(漢) 무제(武帝)의 흉노 정벌 같이 국가민족의 안위를 위한 용병이었다.
그러나 태종이 동돌궐을 정벌한 후도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변치 않았다. 다시 말해서 태종이 동아시아의 패권에서 힐리(頡利) 가한(可汗)을 대신해서 천가한(天可汗)이 된 후 국가의 장기적인 안위를 위해 스스로 대책을 세우기를 서북에서는 반드시 파미르 고원을 차지해 천산(天山)을 국방선으로 하고 동북에서는 요동을 차지해 이를 국방선으로 해야 당(唐)의 장기적 안전이 확보된다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첫째, 태종은 고창(高昌)과 쿠차(龜玆. Kucha)를 멸망시킨 후 위징(魏徵)의 간언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들 지역에 대신(大臣)과 맹장(猛將)을 파견해서 직접 통치했다.〈동서(東西) 돌궐 땅에서는 모두 현지 추장들을 도독자사로 임명했다.〉
둘째, 요동을 차지한 후에도 태종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고종은 고구려를 멸한 후 중국인을 남겨 현지 추장과 함께 공동으로 통치하게 했다.〈이 역시 동서 돌궐에서 현지 추장들을 도독자사로 임명한 것과 다르다.〉 이 또한 당(唐)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한 후 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쥐는 정치정세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이 되었다. 당시에 태종이 이런 원대한 방침을 관철하려 노력했다는 것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첫째, 태종은 낙양에서 동정(東征)에 나서려 할 때 설연타가 돌궐을 압박하자 돌궐을 하남 땅〈현 내몽골 이극소맹(伊克昭孟)〉으로 옮겨 놓았는데, 모든 신하들이 하남은 수도 장안에서 가까워 후환이 될 수 있다고 하자, 태종은 “장차 15년은 돌궐로 인한 문제가 없을 것을 장담한다.”고 했고 정주(定州)에 도착하자 다시 신하들에게 “변방 모퉁이들이(북방과 티베트) 다 평정되었는데 이곳(고구려)만 아직 평정 못해 내가 더 늙기 전에 사대부의 힘을 빌려 이곳을 취하려는 것이다.”고 했다.
이를 보면 우리는 나라를 보호하려 했던 태종의 원모(遠謀)를 알 수 있다. 방현령(方玄齡)이 임종시 한 말은 한때의 평화를 위한 말에 불과했다. 더욱이 당시 연개소문은 야심이 넘쳐 동으로 말갈과 연합하고 남으로는 백제와 연합해 동아시아의 한쪽에서 작은 패권을 쥐고 있으면서 또 당(唐)과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누차 침범함으로써 천가한(天可汗) 태종의 위엄에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唐)은 장기적 국방을 위해서도 그렇고 천가한(天可汗)의 영도력과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도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를 어찌 “사출무명” 또는 “궁병독무”로 비난할 수 있는가? 역사 연구로 당시 역사적 배경과 국제정세 변화의 핵심 관건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의 진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역자 주: 이곳에서 당(唐)의 고구려 정벌을 합리화하려는 논리는 역사 왜곡에 불과하고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이론에 불과하다. 중국으로서는 돌궐이나 설연타 정벌은 국방을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지만, 고구려 정벌은 “사출무명” 또는 “궁병독무”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화족(華族)이 흉노나 돌궐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長城)을 쌓았지만, 고구려는 유목민족인 흉노나 돌궐같이 중원(中原)을 침입한 적도 없고, 다만 중국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추구했을 뿐이다. 정관 5년 백성을 총동원해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서남쪽 바다까지 1천리가 넘는 장성(長城)을 쌓은 것이 누구이고 누구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는가? 당(唐) 태종이 동돌궐을 격파 후 소위 천가한(天可汗)이 된 후 자신의 위엄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했던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이었다. 수(隋) 양제의 고구려 침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점에서 당(唐)의 창업 공신 방현령(房玄齡)이 죽기 전 올린 상소는 진정 명문(名文)이었다. 특히 이 상소문에서는 현재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관련된 중요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근래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로 지방정권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지만 방현령은 태종의 동정(東征)을 ‘척지개강(拓地開疆)’이라고 표현했다.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이었다면 이를 어찌 ‘척지개강’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도 당(唐)은 고구려를 타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방현령이 고구려와 당(唐)의 관계를 ‘신절(臣節)’로 표현한 것은 당시 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양국의 특수한 외교관계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작가정보
저자 겸 편집위원 소개
본 번역물의 원서는 중화민국 대만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물러날 당시 동행한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대만 삼군(三軍大學)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최근 청대(靑代) 이후 태평천국까지 역대 내외 병란을 왕조 및 시대별로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정리, 평가해 서술한 것입니다.
장위국(蔣緯國) 삼군대학 교장, 방호(方豪) 대만대학 교수, 도희성(陶希聖) 북경대학 교수, 전목(錢穆) 청화대 교수, 황계륙(黃季陸) 사천대학총장 겸 대만대학 겸임 교수, 진정원(陳廷元) 대만 국립정치대학 국제관계 연구원 등 다수의 필진이 공동으로 저술하였습니다. 1955년 대만 국가적 사업으로 발의해 1972년 초판 발행까지 18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번역 민경길
민경길(閔庚吉)
육군사관학교 제30기
전 육군사관학교 법학교수
육군사관학교 및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졸업(법학박사)
육군사관학교 사회과학처장 역임
국방부 국방개혁위원회 위원 역임
국방부 노근리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법률자문위원 역임
대한적십자사 국제법 자문위원 역임
주요 저서:《군법개론》, 《핵무기와 국제법》, 《군사법 원론》, 《병법사》(전 4권), 《조선과 중국의 궁술》 외 다수
번역 김종운
육군사관학교 제31기 졸
서울대학교 중문과 졸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
육군사관학교 중국어 교수 역임
국방대학교 합참대학 중국전략학 교수 역임
합참 전략과 전략기획장교 역임
보병 제8사단 포병연대장 역임
육군교육사 전법처장 역임
기획재정부 비상계획관 역임
주요저서: 《중국전략론(역)》, 《중국의 군사력》, 중국 배낭여행기 《대장정을 넘어서》, 《자전거로 가는 신열하일기》, 수필집 《꽃편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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