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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

윤재하 지음
에버코인

2020년 08월 14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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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0.58MB)
ISBN 979118568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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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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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기다릴 수 있었는데, 빨리 나왔네.”

한 번 시작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인생이 잔인하게 속삭였다.
유독 단정하던 교복과 틈 없이 완벽한 슈트가 겹치는 순간,
12년 세월이 실감났다.

“할 말이 뭐야?”
“나도 잘 지냈어.”

내가 쫓기듯 도망친 그 시절에 서서 여전히 반짝거리는 차규일.
결코 달갑지 않은 재회.
아무리 고의로 무례해도, 그는 너무나 태연하다.

“백서이 그대로네.”

변했다는 걸 스스로 잘 알면서도
도리 없이 그의 눈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제 막, 꽤나 익숙한 저 눈빛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1~11
Epilogue
작가의 말
차규일

남자의 입매쯤에 시선이 닿았을 때 단정한 입술을 비집고 나온 말이 뜻밖이었다.
“백서이?”
이름을 부를 만하게 눈에 익은 하관이 아니었다. 마저 고개를 젖혀 남자의 눈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암갈색 눈동자는 낯설고도 낯익었다. 마주친 눈빛이 슬쩍 빛난다. 자신의 눈썰미를 확신한 듯.
“서이 누나 맞지?”
나이에 대한 힌트를 받은 순간 기억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쫓긴 비둘기처럼 아무 데로나 날아가는 기억이 뒤섞였다.
“나 기억 안 나?”
문득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시간이 터널을 통과하듯 빠르게 역행했다. 순식간에, 아직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우뚝 멈춰 선다.
그날은 엄마도, 나도, 아버지도 모두 평소처럼 각자의 자리를 지켰었다. 출근이 늦었던 엄마는 현관에서 아버지와 나를 배웅했고, 아버지는 차로 보충수업이 있던 내 등교를 도왔고, 나는 차에서 내려 등교하는 아이들의 무리에 섞여 들었다. 무엇이 어긋났던 건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잊었다고, 아니 적어도 묻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들춰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대도 모르는 척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드러낸 얼굴로는 더더욱.
하는 수 없이 미간에 머물던 기억들을 떨쳐 내고 소리를 냈다.
“귤.”
이렇게 말할 때면 표정을 담은 적이 별로 없는 얼굴에 피식 웃음을 머금고는 했다, 지금처럼. 그때는 그를 이렇게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일부러 한 번씩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들러 봤으면 됐다. 현실의 나는 다시 샤워실로 걸음을 옮긴다.
“그게 다야?”
비난인지 서운함인지 가늠되지 않는 표정이 앞을 막아섰다. 그를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랜만이라거나 어떻게 지냈느냐거나 하다못해 네가 반갑지 않다는 반응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으냐고.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의 나는 알지 못했다.
어느 대응도 없이 눈만 깜빡이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나는 가려던 참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더는 그가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도주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웃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더는 누구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귤’이라고 부르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게 된 나를, 그래서 당황하고 만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탈의실에 들어서 태연한 척 로커를 열고 옷을 벗었다. 이어 샤워기를 틀고 몸을 씻는 일에 집중한다. 빌어먹게도 눈앞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개수만큼 그때의 기억이 소생한다.
별수 없이 일찍 샤워를 마쳤다.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는 일에 집중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보며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빠뜨리는 것 없이 짐을 챙겼다. 그리고 서둘러 피트니스클럽을 나서며 생각했다. 마지막 한 번의 PT를 잘 넘기지는 못했으나 곧 지나갈 일이라고.
하나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더 기다릴 수 있었는데, 빨리 나왔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머릿속을 떠돌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시작된 일은 쉽사리 되돌릴 수 없다고, 인생이 속삭이고 있었다. 잔인한 속삭임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짝이는 대리석 벽에 기대었던 남자가 등을 뗐다.
빛바랜 기억 속의 불완전했던 소년은 완전한 남자가 되어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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