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파라시옹

강은정 지음

인사이트브리즈 2020년 06월 25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재기 발랄한 석 달 된 태아는 자신을 사라지게 하려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엄마에게 서운 하다. 태아는 과연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의 고민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마름모꼴 진흙덩어리들에게 잡아먹히는 악몽으로 시달리고, 처음 듣는 어떤 나라에서 돌팔이의사가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 우물에 풍덩- 빠뜨렸다는 뉴스를 듣고 아연실색한다. 자신의 존재를 반기거나 알아주는 사람은 전혀 없고, 사라지게만 하려는 일관된 환경에 좌절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도 담담하게 버티고 있는 다른 태아 친구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는다. 16주된 태아 친구와 3일 후면 세상 밖으로 나갈 태아 친구 그리고 장애를 가진 태아 친구. 갑작스런 아빠의 해고 소식까지 겹치자 태아의 소망은 자꾸 멀어져만 간다.

목차

1. 마름모꼴 진흙덩어리
2. 태아, 친구를 만나다.
3. 부모님의 대화를 생중계 받다.
4. 아빠의 해고소식
5. 뾰족턱 아줌마와의 혈투 & 사전교육현장
6. 나의 진정한 친구, 양수
7. 아랫동네로의 이동
8.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의 생활

책 속으로

1. 마름모꼴 진흙덩어리

이곳도 장담하긴 이르다. 운이 좋으면 구 개월에서 십 개월까지는 버텨서 살 수도 있고, 운이 저만치 잽싸게 도망쳐버리면 짧게는 몇 주에서 몇 달 안에 쓰레기장으로 직행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편안하다. 어떤 불편함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이곳은 안락하기 그지없다.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맛있는 음식을 섭취할 수 있으며, 따뜻하면서도 영양가가 듬뿍 섞인 물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다. 또 내가 먹고 싶은 메뉴가 떠올라서 먹고 싶다는 신호만 보내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후엔, 바로 맛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세상과 저세상을 통틀어 이곳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하고 좋기만 하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전혀 아닌 것 같다. 엄마의 표정은 나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는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혼자서 고민을 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도 터벅터벅 무겁기만 하다. 좀 전에 산부인과에서 의사선생님을 만나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엄마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엄마의 뱃속에 나란 존재가 있다는 걸 의사에게 듣는 순간부터 얼굴의 웃음기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의사선생님에게 임신이 확실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엄마의 심장소리가 빨라졌다. 엄마의 심장박동이 빨라지자 덩달아 내 심장도 빨라지고 있었다.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깍지 낀 손가락만 쳐다봤다. 의사선생님이 해주시는 몇 마디 말을 들으면서 힘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리고 의사선생님께 인사도 없이 진료실 문을 닫고 힘없는 걸음걸이로 나와 버렸다.

엄마는 구입한지 꽤 오래 돼 보이는 얄궂은 패딩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다리에 기운이 빠지는지 진료실 앞에 길게 나열된 대기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내 코를 훌쩍이면서 눈물까지 고이기 시작했다. ‘후우~ 임신이구나. 어쩐지…. 당분간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생각 좀… 해봐야겠다.’ 엄마는 청포도색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배부른 산모들을 둘러본다. 모두들 학수고대하던 아기였는지 행복한 미소를 띤 채 순서를 기다리면서 잡지를 펼쳐보고 있었다.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콧물을 닦아내고 있는데 만삭을 한 산모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옆자리에 앉는다.
“저… 실례지만,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눈물을 흘리고 계셔서요.”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투다. 엄마는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눈물을 거둔다.

작가정보

저자(글) 강은정

강은정 숙명여대 인력개발정책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이다. 1인출판사 [탈피]를 7년 남짓 운영하면서 소설로 ‘크로키’, ‘경쾌함’, ‘소나무나라’, ‘앵프라맹스’, ‘아시피라시옹’, ‘너를 넘어서 바통을 잡아!’, ‘모르포제 ; 나의 나와 살아가기’와 시, 에세이를 쓴다. 현실에 살면서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고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