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나라 사람

손영목 지음

케이티 제공 2020년 03월 25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사이비종교집단이 장악한 섬에 발령 받은 한 젊은 교사. 비리와 불법이 암암리에 법제화된 지역사회에서 작은 불씨를 일으키려 하지만 거대한 적의 그늘은 깊기만 하다.

목차

1. 신의 나라 사람
2. 귀로
3. 고향의 바람
4. 드러나는 얼굴
5. 손녀
6. 하늘 오르기

책 속으로

아침 9시에 출항하는 은하호를 타려고 선착장까지 나갔던 구인석은 기어코 공안원(公安員)한테 체포됐다.
그가 선착장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8시 54분인데, 이처럼 빠듯하게 시간을 대어 나간 것은 형편 좋은 여행객처럼 느긋하게 행동하다가는 어쩐지 무사히 여객선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표를 사려고 매표구 앞에 다가가 여행가방을 놓고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다가, 매표소 안 맞은편 벽기둥에 비스듬히 걸린 거울 속에서 대합실 문 앞을 얼찐 지나가는 밤색 제복차림 공안원 두 명을 본 것이다.
구인석은 심장이 서서히 뛰놀기 시작함을 느끼며, 젊은 여자 매표원한테 여객신원카드 용지를 받아내 빠르게 인적사항을 기입한 다음, 주민등록증과 돈을 창구에 밀어 넣었다.
여객신원카드를 훑어보던 여자가 사무적인 상냥한 말씨로 여행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구인석이 여행증은 없다고 하자, 여자는 별안간 눈빛이 새침해지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없다니, 댁은 규칙도 모르세요?”
“규칙은 압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부턴 규칙에 따를 의무가 없어진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주민 모두가 신의나라교 신자인 이 섬에서는 법과는 또 다른, 그들 교리에 입각한 질서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령 섬 바깥으로 여행하려는 사람은 소속한 예배당 주임사제(主任司祭)의 허가서인 여행증을 반드시 소지하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드문 일이지만, 그들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인물이 일시적 여행 목적으로 섬을 떠났다가 아예 돌아오지 않거나, 섬을 빠져 나간 사람 중에 신의나라교의 비리를 바깥세상에 고발하는 불편한 사례가 발생함으로서, 여행증은 어느덧 필요할 땐 신앙심의 척도와 직결되는 효용 가치를 발휘하는 만만찮은 물건이었다. 그러므로, 섬에 놀러왔다가 떠나는 여행객도 아니고, 주민등록상으로 엄연히 이 섬의 주민인 구인석이 섬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려고 하면서 여행증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 사회의 규칙으로 보아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난 이제 신의나라교 신도가 아닙니다.”
구인석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 난 이제 신도가 아냐. 아니, 여태까지 내 가 진정으로 신도였던 적은 없었어.’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문득,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와 얹혔다. 돌아보니, 어느 틈엔가 공안원 두 명이 곁에 와 있었다.
‘드디어 왔군.’
아찔한 절망감이 오한처럼 전신에 밀려오며, 한편으로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구인석 선생이시죠?”
오른쪽에 선 약간 익살스러워 보이는 공안원이 물었다. 스물예닐곱 살쯤 됐을까, 두 사람 다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이었다.
‘역시 밀고했구나.’
구인석은 일순간 교장에 대해 살기에 가까운 증오를 느꼈다.
“어디 여행하시려는가 보군요.”
오른쪽 사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왼쪽 사내가 매표구로 손을 집어 넣어 구인석의 주민등록증과 여객신원카드와 돈을 움켜잡아 꺼내더니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이럽니까?”
“미안하지만, 사문회(査問會) 사무실까지 좀 가셔야겠습니다.”
“사문회라니, 난 지금 은하호를 타야 한단 말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구 선생, 이거 왜 이러시죠? 여기서 하루이틀 살아본 것도 아닐 텐데.”

출판사 서평

집단과 개인의 갈등, 그 속내를 세밀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손영목

저자 손영목은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및 '현대문학상', '계간문학상', '채만식문학상' 등 수상을 통해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왔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풍화』, 『거제도, 포로수용소』, 중단편집 『산타클로스의 선물』, 『장항선에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