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환상

손영목 지음

케이티 제공 2020년 01월 03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꿈과 환상을 소재로 유년기의 경험들, 역사여행, 사랑, 의식의 흐름, 현대인의 우울과 고독 등을 판타지 기법으로 작품화하였다.

목차

1. 안개의 우수
2. 밀랍인형들의 집
3. 잿빛 안개 저편
4. 슬픈 인어
5. 미로에서
6. 용굴(龍窟)
7. 환상여행
8. 죽음에 관한 명상
9. 스틸라이프
10. 고사나목과 광진역
11. 백제성에서

책 속으로

“나가나 들어오나 안개 천지네.”
찻쟁반을 들고 들어온 아내가 방 안에 자욱한 담배연기를 정녕 싫은 듯 한손으로 걷어내는 시늉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벌써 십 년이 지나도록 결혼생활을 해오는 처지인데도 아내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어 질색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제 담배입니다. 하루 한 갑 반, 어쩌다 번역거리가 겹치고 원고가 밀려 조급해져야 겨우 두 갑을 채우는 끽연량이고 보면 그다지 심한 편도 아닌데, 아내는 걸핏하면 건강과 가계부사정을 끌어다 붙이며 저에게 금연을 요구했지요.
아내는 탁한 공기에 거의 병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편이기 때문에, 거리에 나갔다가 매연이라도 마시고 들어올라치면 허옇게 떠서 드러눕는 시늉을 하고, 애새끼 공부만 아니라면 당장 공기 맑은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푸념을 입버릇처럼 뇌었습니다.
이런 아내도 엉터리 번역물일망정 소위 글을 쓴다는 직업의 피가 마르는 고통을 이해할 줄은 알아서, 제가 몇 시간이나 원고지를 붙들고 앉아 용을 쓰며 담배를 태워댈 때는 그래도 지금처럼 안개가 어쩌니 하는 투의 완곡한 불평정도로 참아낼 줄을 알았습니다.
“밖에 안개가 끼었어?”
만년필을 놓고 허리를 펴며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커피잔을 들었습니다.
“낀 정도가 아냐. 숫제 앞이 안 보일 지경인걸.”
“웬 놈의 안개가 그리 심하담.”
“애들 기관지가 걱정이야. 창문 좀 열어 환기시켜줘?”
그렇게 물은 아내는 제가 거절하기도 전에 벌써 창문께로 가 커튼을 젖히고 유리창을 열더군요. 늦가을 저녁의 찬 기운이 우욱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저는 따끈한 커피를 목구멍에 흘려 넣으며, 아내의 까만 머리 너머로 밖을 내다봤지요. 정말이지 짙은 안개였습니다. 아직 어두워지기 전의 어스름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안개가 창밖의 거리 위에 꽉 차있었습니다. 방 안의 담배연기가 빠져나가기커녕 도로 밀려들어올 것 같은 답답한 광경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강도 바다도 없는데 무슨 조화일까.” 아내는 창문을 도로 닫으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렸습니다. “마치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아.”
순간, 저는 그만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실로 감전과 같은 강한 충격이랄까요.
‘마치 구름 속을 걷는 것 같군요.’
아득한 세월의 저쪽 공간에서 그런 속삭임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안개와 구름. 여자와 여자의 감성. 이 무슨 등골 오싹한 우연입니까. 숨기고 숨겨온 마음속의 비밀을 폭로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출판사 서평

꿈, 환상을 소재로 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 현대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호평을 받았으며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가정보

저자(글) 손영목

저자 손영목은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및 '현대문학상', '계간문학상', '채만식문학상' 등 수상을 통해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왔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풍화』, 『거제도, 포로수용소』, 중단편집 『산타클로스의 선물』, 『장항선에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