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월의 그림자

김유미 지음

에버코인 2018년 11월 02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 그중에서도.


“저는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 「열월熱月의 그림자」

“널 그리고 싶어졌어.”
― 「고양이가 있는 풍경」

“……화의 해피엔딩으로.”
― 「카페 세레노cafe sereno-소화 편」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을 위해 사랑한 사람들이 남긴 세 가지 이야기.

목차

1. 열월의 그림자
上
中
下

2. 고양이가 있는 풍경

3. 카페 세레노

책 속으로

로렌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긴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탓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속도를 늦추었다.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의식이 희미한 삐걱거림을 잡아낸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집 안을 걸어 다니는 익숙한 소음이었다. 유모가 잠시 깬 모양이었다. 비몽사몽 중에 납득한 로렌의 귀에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렸다. 문득 그녀는 그것이 매우 가깝다고 느꼈다. 마치 집안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의 등 뒤에서 나고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로렌은 반사적으로 한 손을 베개 밑으로 넣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억센 손이 즉각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끊고 그녀의 목 뒤를 내리쳤다.
로렌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숨겨 뒀던 단검을 꺼내 저항해 볼 기회도 없이,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땅으로 꺼질 듯 아득하게 멀어지는 감각의 끝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입을 막고 있는 커다란 손의 울퉁불퉁하고 거친 감촉이었다.

(중략)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흑발의 남자는 정말 끔찍한 흉터를 갖고 있었다. 왼쪽 이마에서부터 뺨까지, 그리고 셔츠 아래로 보이는 팔과 손까지 검붉게 변한 피부는 마치 어린 신이 갖고 놀다가 지겨워져서 내팽개친 진흙 장난감 같았다. 반면에 다른 반쪽은, 화마에 당하지 않고 남은 오른쪽 얼굴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공들여 빚은 작품을 연상케 했다.
그처럼 확연한 대조를 이루어 더욱 참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괴한 얼굴에서, 양쪽이 유일하게 똑같은 것은 차분한 빛을 띠고 있는 푸른 눈동자였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하늘 속에서나 찾아야 했던, 항상 하늘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 눈이 생명을 담고 그 자리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붙들면서, 로렌은 간신히 입을 열어 가슴 깊숙한 곳에 묻었던 이름을 속삭였다.
“시릴.”
“벌써 깨어났나.”
감정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는 오히려 지독한 현실감을 주었다. 로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시릴……, 당신, 정말로……?”
“아니.”
단번에 부정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혁명의 개. 피로 길들여진 늑대. 자유의 여신이 악마에게 강간당해 낳은 사생아.”
털썩,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는 얼어붙은 로렌을 똑바로 보았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그 이름은 아니야, 로렌.”

작가정보

저자(글) 김유미

김유미(유레미아)

마이너 원더랜드의 농노.
좋아하는 단어는 인과응보, 사필귀정, 취향존중.
「디어레이디Dear Lady」, 「감별鑑別」, 계절 시리즈, 「꽃이 피는 자리(공저)」 등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