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의 서정

김석현 지음

논밭 2014년 06월 03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소나무





그대의 수염뿌리는
대지의 어느 지점
수액을 보고 미로의 찾아,

굽이 굽이 굽어보다가
줄기 줄기 바늘잎 달아
작을 솔 씨 키워내서
바람에 부탁하여

어디로 보내는가,

휘어지고 굽어진 등걸
눈보라, 비바람 흘러도
인고의 신음 않는
무언의 모습,
그대를 옆에 두고 보리라.

논어를 읽으시던
초당(草堂) 하내 큰 기침에
바름 바름 솔잎을 흔들며
어둔 밤을 지켜주던,

고향 마을 소나무여.

























열차 속에서





나 여기 앉아 있은데,

산이 지나가고
나무들이 지나가고
집들이 지나간다.

나 여기 앉아 있는데,

해가 넘어가고
달이 넘어오고
낮이 가고 밤이 되었다.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동무들이 떠나가고,

나는 여기 앉아 있는데.






























슬픔 하나





우리
여기 모였으나
마음은
목소리에 담겨
사라지고,

서로의 눈은
서로를 못 보는 장님.

서로의 손은
서로를 못 잡는 불구,

몸을 떠난
마음은 보이지 않고,
몸은 냄새가 얹어

우린 울고 있다.































고향 가는 길





야산 아래로
들은 널려 있었다.
겨울 볕에 솔잎 향내가 돌았다.

흙더미에 시든 풀잎
듬성 듬성 자리 잡은
이 세상 떠난 분들.

팔려가는 돼지의 울음소리가
산을 울리는데
보리밭에서 꿩과 산비둘기가
흙을 들추며 먹이를 찾고 있다.

칼퀴나무 수북한
산길을 따라 가노라니
공자님과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던 분들이
돌비석으로 서있었다.

채 시들지 않은
조화 바구니가 뒹구는
풀숲에 서니
미영 밭 너머
샛밥 바구니를 이고 오시던
엄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버린 모습들
남아있는 모습들이
바꿔지는데

멀리 팔려가던 돼지의 울음이
산을 흔든다.
















도리깨질





햇볕에 잘 마른 콩깍지
아래로 돌려 위로 넘겨
휘갈기면,

바스락, 바스락
떨어져 나오는 콩알 알갱이.
목수건에 땀을 닦는 삼촌은
우리 집 일군.

장딴지 근육 탄탄한
힘을 받아
힘차게 얼려진다.
앞에서 내리받아 후리치고
뒤로 올려 내리친다.

볕 좋은 여름
고구마 한 개 먹고,
냉수 한 보시기 마시고
우리
삼촌 마루에 걸터앉으면,

흰 구름은
산 너머에서
뭉개, 뭉개 솟았지.
























요청(要請)





하늘에 계신 하느님,

그가 잃어버린 그의 말, 반만이라도
돌려 주시오소서.

지금은 흙 파고 쟁기질하고 사는,
나이 한 살 더 많고
어려서 홍역 앓다 독한 한약 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그래도 나 무척 좋아 했던,

하나님
그래도 고향 지키고 사는
고향 가면 언제나 늘 반겨주는
그의 언어의 반만이라도
이제는 돌려 주시오소서.

친구들도 다 떠나고 없는,
이슬 떨며 논 뚝 밭 뚝
소 앞세워 걸어가고 있을,

아침 길, 저녁 길, 흙냄새, 풀냄새
어이 어이 어이

먼 촌수 조카,
이렇게 시 쓰고
말하는 법 가르치고 사는 저는

가끔 그가 생각나서입니다.



















어린 날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는 손들이 보여
그날은 웃었다.

시루바위 옆에 진달래
넝쿨져 피고
황토 산에 정금이 열면,

토끼 잡으러,
꿩알 주으러,

연을 달리다 말고
보리밭 너머로 달음박질
치면서 누나들이 남겨둔
시간을,

그렇게 메워 가면서.

작가정보

저자(글) 김석현